오늘의 맛, 해피 버스데이

2025-11-17     강효진

미역이었다. 여덟 살 아이 키만 한 길쭉한 택배 상자를 열자 두툼한 기장 미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가 가까운 동네로 이사 후 처음 받는 선물이었다. 미역국을 좋아하느냐는 친구의 말에, 흔쾌히 대답했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산후 조리를 해야 하는 산모에게 어울릴 법한 커다란 미역 앞에서,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커다란 미역을 적당히 잘라 밀폐용기에 나누어 담는데,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섬세한 미각으로 맛있는 음식에 진심인 친구의 마음이, 까슬까슬 잘 마른 미역 이파리 사이 사이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역에서 풍겨오는 짭조름한 내음에 어느새 군침이 돌았다. 당장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미역 본연의 맛을 살린, 깔끔한 미역국이. 미역부터 불렸다. 그 사이 멸치 육수 낼 준비를 했다. 손질한 멸치를 마른 팬에 2~3분 정도 볶으니 고소한 향이 살살 풍겼다. 노릇하게 볶은 멸치를 찬물과 함께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뒹굴던 무도 한 조각 썰어 넣었다. 잘 불어 부드러워진 미역을 바락바락 씻어 건져냈다.

이제 미역국은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었다. 살짝 달군 냄비에 불린 미역을 볶다가 만들어 둔 육수를 부어 뭉근하게 끓였다. 어느새 국물이 뽀얗게 우러났다. 소금과 국간장을 적당히 넣어가며 간을 보고, 마지막으로 다진 마늘을 넣어 한소끔 더 끓였다. 부엌을 채우는 미역국의 구수한 향기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사발 가득 담은 미역국, 밥 한 그릇, 배추김치 한 줌. 단출하게 차린 식탁 앞에 앉았다. 뜨거운 국물을 한입 떠먹자,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드러운 미역을 씹을수록, 온몸으로 숨을 쉬는 바다의 깊은 향이 났다.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먹고 나니, 뱃속이 부듯해졌다. 미역국을 먹었을 뿐인데, 내 생일인 것 같았다.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 <해피 버스데이> 속 주인공처럼.

소설 <해피 버스데이>의 '나'는, 생일도 아닌데 친구 윤석에게서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하루쯤 생일인 척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마침 회사 구내식당 점심 메뉴로 미역국과 잡채가 나오자 생일상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이 생일이라는 거짓말에 회사 동료들과 주방 아주머니까지도 기쁘게 축하해 준다. 생일 선물로 술을 사겠다는 부장님과 함께 고사리 조기찌개를 먹던 그날 저녁, 식당 주방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 생일도 아닌데 "생일인 척" 보낸 그날,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팔이며 다리, 여기저기 깁스를 한 환자들로 가득한 병실을 둘러보며 '나'는 깨닫는다. 깁스는커녕 병원에 입원 한번 해 본 적 없었던 자신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이제껏 스스로 운이 나쁜 사람이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 평범했던 날들이야말로 행운의 무심한 얼굴이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친구 윤석에게 전화를 걸어 생일을 축하해준다. 오늘 하루를 생일처럼 지내라고. 점심에 미역국도 사 먹고 저녁에는 케이크에 촛불도 밝히라고.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축하할 일임을 '나'는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창밖에 도착한 가을을 바라보다가, 지난봄과 여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이사 문제로 지쳐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집주인에게 이사 계획을 알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전세금 반환이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그 바람에 이사할 집을 다시 알아봐야만 했다. 경기도에서 동해안으로의 이사가, 마치 타국으로 떠나는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지난여름 유난스러웠던 폭염처럼, 속이 끓던 시간이었다.

가을빛으로 무르익은 남천 열매, 우리 동네 가을 풍경  

이제 나는 창문을 열면 산이 먼저 내다보이는 동해안의 조용한 동네에 있다. 친구가 보내준 미역으로 내 입맛에 맞는 미역국을 끓여 먹고 나니,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문득 알 것 같았다. 속이 탔던 지난 계절도 오늘에 도착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평범하다 못해 울퉁불퉁한 하루하루가, 살아 있음이 내게 전하는 축복이었음을.

알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또다시 불평을 늘어놓으리란 걸.

그토록 어리석은 것이 나라는 걸.

그런 날이면 친구가 보내준 미역을 천천히 불려야지. 짙푸른 바다 향기가 부엌에 퍼지면, 나의 "해피 버스데이"가 다시 시작될 테니까.

 


강효진 작가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을 수집해 글로 풀어내는 에세이스트.
<일희일비 북클럽> 운영과 에세이 강의 등으로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삶의 풍경들을 세심하게 기록하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오늘도 나를 대접합니다》, 《한강 문학 기행》(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