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중광의 가짜 그림
중광의 가짜그림
“불과 몇 년 전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스님의 그림에 대해 대중과 시장은 기인의 기이한 작품이라며 엄청난 환호를 보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환호성은 흔적조차 사라져 그의 작품 가격을 논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거품이었음이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중광 스님의 작품에 대한 작품을 이야기한 평론가들은 과연 어떤 기준에서 작품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의 눈은 일회성이었을까?” 이 글은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H 씨가 2016년 2월에 유로저널에 기고한 「실물경제와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손들 3-(1)」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자는 결론적으로 중광그림이 거품에 의한 허상이라며 당시 거품을 주도했던 평론가들을 절하하였다. 작자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듯 중광의 그림이라고 한 점을 올려놓고 자신의 평가가 틀리지 않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보라 누가 이따위 형편없는 그림에 엄청난 찬사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 같다. 저널에 올라온 버젓한 그림은 작자의 냉엄한 평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 엉성하게 보인다.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 특히 미술에 조예가 깊은 평론가들은 아아 우리가 저따위 그림에 박수를 쳤다니, 평론계가 중광처럼 잠시 미쳤던 것은 아닐까 했을 것이다.
나는 그 글은 지금이라도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그가 중광의 작품이라며 올린 그림은 중광의 진짜그림이 아니라 가짜 그림이기 때문이다. 아마 작자가 시중에 떠도는 가짜 그림을 진짜그림으로 착각을 하고 인용하다 보니 그런 혹평이 나왔을 수 있다고 본다. 일단 똑같은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그림은 중광의 허튼소리 하권(1986년 10월 서음출판사)에 올라온 그림과 판박이이다. 성기를 드러낸 말 옆에 동자가 서 있는 그 그림은 조악할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선기(禪氣)가 보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낙관(아주 비슷하지만 엄연한 가짜이다)도 이름자도 그와는 한참 멀다. 낙관만이라도 주의 깊게 봤더라면 진작과 위작을 구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름을 걸고 미술분야의 컬럼을 쓰는 전문가라면 말이다.
중광의 그림에 부정적인 비평가들은 중광을 처음 발굴한 랑커스터 박사가 미술에는 조예가 없다는 말을 한다. 아마 그럴 수도 있다. 미국 국적의 대학교 동양학과장으로서 아시아의 불교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석학이었지만 미술사학의 전문가나 미술평론가가 아닌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불교학자요 불교전문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교를 연구하며 동양의 수많은 달마 등 선화를 보아왔던 그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중광의 그림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렇게 힘찬 붓질로 그려낸 선화는 처음 본 것이다. 그가 중광의 그림에 매료된 것은 그 힘에 넘치는 붓질, 강렬함과 간결함이 말 그대로 호방장쾌(豪放壯快)한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동안 보아왔던 선화는 모두 규격품이었다. 복제한 초상화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중광의 선화는 달랐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무심선필로 단숨에 그린 달마는 구상시인이 말대로 허덕 허덕 마루턱에서 느닷없이 만난 은총 소낙비 같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가 직접 목도한 선(禪)과 속(俗)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행(奇行)에서 추측하건데 저런 오염덩어리에서 이처럼 청정의 그림이 나온다는 것이 불가사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적 판단에서 볼 때 중광의 선화가 뛰어나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었다. 미국에 돌아가 한국에서 수집한 중광의 그림을 1년 동안 여러 전문가에게 검증하였다. 영문 도록과 한국의 피카소라는 애칭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제멋대로 추면서 그린다. 다시 말해 희열을 안고 아무런 약속이나 구상이나 데생에서 벗어나 붓이 그냥 물 흐르듯 가게 하는 것이다. 이때의 붓을 무심필이라고나 할까. 종이와 먹과 내 자신이 일치한 삼매경이 아니면 그림이 안 된다.”이 말은 1979년 4월 현대시학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표지그림을 그려주며 중광이 한 말이다. 그의 작품은 실패작이 있는가 하면, 광활함과 자비와 동심세계와 위엄과 신비와 현실과 미래가 뒤섞인 사차원의 세계와 길이 5미터 40, 넓이 2미터 30의 대작을 10분 만에 일필로 섬광같이 번쩍이며 내갈기는 대담한 필력,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내지른 힘차고 강렬한 붓질(정말 붓 힘으로 찢어진 작품도 여러 점 있다.)의 예술 세계가 녹아있는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 값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스스로를 불교계의 걸레라 했고 세인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천하의 무애 자유인이 원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런저런 까닭으로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세간의 그림들을 보면 과연 돈과 가치가 같이 가는지도 의문이다. 중광은 그림을 잘 팔지 않았다. 당시 그의 달마도를 얻기 위해 정말 치열하였다고도 하는데 지인들을 돕기 위해 어쩌다 그림을 팔았다. 나머지는 거의 선물한 정도였다. 기록에 보면 중광 화백이 미국에서 처음 그림을 전시하고 대학 강의도 했을 때가 1981년도 경이었다. 대작 달마(전지 사이즈)를 장당 3천불에 Novick라는 화상(畵商)에게 넘겼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환율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20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9급 공무원 4호봉 월급이 10만 원 정도, 담배 한 값이 200원, 서울 강남의 아파트 15평 한 채가 1,200만 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번듯한 미전(美展)의 수상자도, 미대를 나온 재원도, 전시회를 한 유명화가도 아닌 가난한 나라의 Monk(스님)가 그린 그림의 대우였다.
그림이 너무 유명하다보니 가짜그림이 판을 쳤다. 자신이 가짜그림을 사서 진짜 그림과 바꿔주기조차 하였다. 중광 자신도 가짜 그림에 속지 말라고 신문에 따로 광고까지 할 정도였다. 1990년에 가짜 그림들을 직접 찾아서 구매하는 데만 2천만 원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학이나 어린이를 묘사한 그림들은 상대적으로 모방하기가 쉬워 시중에 가짜그림이 난무하고 그러다 보니 그것들이 모두 중광의 작품으로 오해되어 다작(多作)의 화가라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진짜 제대로 그린(그려진) 작품은 300여점 정도이다.
지금도 가짜그림들이 중고시장이나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만큼 대중적이라 누구나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가짜그림이라 하더라도 그의 명성을 대변할 수는 없다. 가짜그림은 가만히 보면 구별을 할 수 있다. 엉성할 뿐 아니라 핵심적인 감정이 다가오지 않는다.
중광이 입적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의 사상과 예술세계, 그리고 무애와 자유의 본산(本山) 1600년 불교 전래 이후 처음이라 했던 중광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중광 미술관 건립 소식과 함께 다행한 일이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로 보이듯 미친 중이요 생짜배기 가짜화가라고 하는 당시의 평가에 대해 중광은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다 맞아 미친놈이 보면 내가 미쳐있게 보일게고 성성한 눈으로 보면 내가 성성하게 보이겠지요. 누가 나를 보고 뭐라 하든 알바도 아니요 상관하지도 않아요.” (1981.11.22. 불교신문)
“종교도 위선이 많고 미술은 시류에만 영합하고 있어 참다운 예술은 무구의 세계이고 미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 (1981.11.22. 조선일보)
현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이사
현 인천 문협 이사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문학의전당)' 외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