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민속문화재 탐방,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과 음애이자묘역 (陰崖李耔墓域)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과 음애이자묘역
고택의 공식 명칭은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이다. 조선 종종 때의 명현(名賢) 이자(1480~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 전해지는 고택으로 본래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ㄷ" 자형 본채 앞쪽으로 "ㅡ"자형의 행랑채가 있어 튼 "ㅁ"자 형식의 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행랑채는 소실되었고, 현재 본채만 남아있다. 사대부가에서는 별도로 사당이 있지만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지어지지 않고 본채 북서쪽에 청방(廳房)이 있어 제사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다른 곳에는 아무 칠이 없는데 비해 이곳에만 단색으로 간단히 채색된 가칠 단청이 칠해져 있다. 본채는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의 단면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민도리 집인데 사랑채는 팔작지붕이고, 맞은 편 나뭇간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날개채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방 전통 양반 가옥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으나,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로 사직했다. 중종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기용되어 대사헌을 지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우참찬(右參贊) (조선시대 의정부에 속한 정이품 문관 벼슬)이 삭탈관직(削奪官職)되어 선대 고향인 용인 지곡동으로 낙향해 사암(思庵)에 살았다. 조광조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12월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음성에 은신하고 스스로 호를 음애라 하였다. 본래 음애 이자 선생이 살던 곳이라 하여‘(전)음애이자고택’으로 불리었다.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면서 조선 전기 가옥 형태는 사라지고 조선 후기의 모습만 보인다. 기묘사화로 인해 충주 땅 토계리로 귀양을 가서 세상을 떠난 음애(陰崖) 이자 선생의 자취는 충주뿐 아니라 음성과 용인에 남아있다.
충북 음성 음애(陰崖)동 각자(刻字)
훈구파들에 의해 1520년 음성 음애동으로 귀양지가 옮겨진다. 음성은 이자 선생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이자는 이곳 음애동에서 1529년까지 9년 동안 머문다. 음애동은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동남쪽 산자락에 있는 마을로 작은 시내(溪流)가 흐른다. 시내 양쪽으로 바위가 우뚝한데, 동쪽의 바위가 일암(釰岩) 바위다. 바위 북쪽에는‘탁영선탑(濯纓仙榻) 갓끈을 씻는 신선의 걸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이자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자 선생은 귀양(歸養) 동안 이곳 일암 바위 위에 초은정(招隱亭)을 짓고 살았고, 일암 바위 건너편에는 마을 이름인 음애동(陰崖洞)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1529년 이자(李耔) 선생은 충주 토계리로 이거(移居) 한다. 그것은 토계리의 자연경관이 좋고, 인근에 교류할 수 있는 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몽암(夢庵)을 짓고 시문도 짓고 후학도 가르치며 살았다. 당시 충주 용탄에는 기묘사화로 낙향한 탄수 이연경과 십청헌 김세필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충주의 유림과 교유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약빙(李若氷)과 허초(許礎)다. 이약빙은 이연경의 4촌으로 문과에 급제해 사복시정을 지내고 충주에 은거하고 있었다. 허초는 충주의 유지로 향청의 좌수를 지낸 선비다. 이자가 귀양온 토계리는 달천이 흐르고 칼바위(劍巖)가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난 명승이다. 그 때문에 시인 묵객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와 문장으로 표현했다.
문학비 자탄(自歎)과 추월(秋月), 즉사(卽事)
1586년에는 선생을 기리는 계탄 서원이 충주팔봉에 세워졌고,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도 배향되었다. 1590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저서로는『음애집』,『음애일록』이 있다. 마당 앞에는 이자 선생 문학비가 서 있다. '자탄(自歎)', '추월(秋月)', '즉사(卽事)'라는 시제가 보인다.
고택의 마루 대청마루 안쪽으로 금서재(琴書齋)라는 편액이 보인다. 고택을 수리․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나왔는데, 그곳에 금서재라는 당호가 있어 최근에 만들어 걸었다. 고택 좌측에는 사당이 동향하고 있다. 최근 건립된‘효문의공부조지묘(孝文懿公不祧之廟)'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묘표는“조선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시문의 이(李)공자(耔)지묘배 증 정경부인 의령남씨 후배 정경부인 인천채씨부좌”라 새겨져 있다.
음애이자묘역 (陰崖李耔墓域)
이자의 묘는 부인인 정경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 후배(後配) 인천채씨(仁川蔡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봉분은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었다. 봉분 앞쪽에는 사초(莎草)가 무너지지 않도록 장대석을 설치해 놓았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석상,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그 앞에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은 문인석이 있다. 이자 묘의 동쪽에 있는 묘표는 개석방부(蓋石方趺; 지붕돌과 네모난 비석 받침) 형태로 1876년에 건립되었다.
1530년 이자는 자신의 행장을 짓고, 1533년 12월 15일 충주 토계리 몽암(夢庵)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534년 봄 용인군 기곡면(器谷面) 선영에 묻힌다. 현재 지명으로는 용인특례시 기흥구 지곡동 산 11-17이다. 이자 선생 묘 위에 아버지 이예견(李禮堅)과 형 이운(李耘)의 묘가 있다. 이자는 1518년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고, 1519년에는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 우참찬이 된다. 그해 11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파직되니, 그의 최종 관직은 우참찬이다. 1577년 노수신(盧守愼)이 선생의 행장을 지었고, 유희춘(柳希春)의 계청(啓請)으로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에서 나왔고, 의는 덕성순숙(德性純淑)에서 나왔다. 도덕박문은 도덕에 해박하고 들은 것이 많다는 뜻이며, 덕성순숙은 덕성이 순수하고 맑다는 뜻이다. 이론과 실천 양쪽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된다.
오백 년 전 이자(李耔)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간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고택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전통미를 엿볼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선비의 고뇌스러운 일생과 번민이 서려 있는 이자의 시(詩), 부(賦), 소(疏), 서(書), 기(記), 발(跋) 등은 이자의 예리한 시국관과 현실을 보는 안목이 불확실한 미래에 오늘을 사는 우리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내딛게 하는 중요한 자세가 아닌가 싶어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