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중광과 제주

2024-05-22     용인일보
필자가 소장중인 중광스님 작품

본적(本籍)이 제주인 중광의 생가 근처에는 100여 미터 남짓한 「중광의 거리」가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조성되어 있다.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에 따르면 생각보다 초라한 수준이라 한다. 제주가 낳은 세계적 예술가의 현주소가 그 정도라는 게 슬프고 씁쓰름하다.

중광은 엄연한 제주의 아들이다. 제주바람을 맞고 살았으니 그렇고, 제주돌을 보고 살았으니 그렇다. 평생 고독하여 춤을 추었지만 사무치도록 그리운 고향의 풍광이 그림과 시와 글로 고스란히 남았다. 그가 그린 산은 상상의 산이 아니라 고향의 산이었고 그리운 어머니의 젖무덤이었다.

중광은 우리나라보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외국에 더 알려져 있다. 그를 한국의 피카소로 인정해 준 곳도 미국이다. 80년대의 엄정한 군부시절에 그의 기행은 당시의 낮은 우리 문화수준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AI가 세상을 삼키는 시대이다. 그만큼 인간적인 것들을 잃고 있음이다. 자유, 자율과 개성, 그리고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의 예술이 점점 희소해지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무궁한 다양성의 사회를 지향해야 하고 그 선두에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이 사회를 향해 메세지를 던진 중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4.3 사건은 7년 이상 이어진 제주도 역대 최대 참사 중의 하나이다. 중광이 13살부터 20세까지 겪었던 가장 예민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온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의 광기의 8할은 채 피지 못하고 제주의 돌담 아래 떨어진 동백꽃이었을 것이며 나머지는 가난과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가 어찌 그날의 비명과 피비린내를 잊었을까. 하지만 어두운 토굴이나 적막한 암자에서 오랫동안 참선을 하고, 10번이나 안거하며 방하착을 터득하고는 복수보다는 용서와 이해를 앞에 세우는 하심(下心)을 실천하였다.

그의 기행(奇行)은 무애(無碍)에 다다르기 위한 선수행(禪修行)이요, 마음 깊은 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4.3의 아픔을 정화하기 위한 행위였다. 수많이 희생된 죄 없는 제주의 영혼과 그 가족들의 슬픔을 대신 정화해준 숭고한 행위였다. 중광은 그 스스로도 당시 목숨을 부지한 자체가 꿈속의 꿈이었고 남의 생명에 덤을 살고 있다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한(恨)의 큰 덩어리가 그렇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참으로 담대하고 맑다. 강인함과 생기가 넘친다. 좌절이라든가 무기력한 작품이 아니며 한 점 한 점 모두가 슬픔과 고통이 선(禪)으로 승화된 명작이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는 여백으로, 제주의 바람은 그의 무정처로, 제주의 한은 정제된 광기로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독학으로 이룬 무심선필, 묵무필가(墨舞筆歌)의 작품 앞에 서면 분명하게 마주하는 서기(瑞氣)가 있다.

하여 중광 작품의 모티브는 제주의 정신과 그대로 부합한다. 제주의 정신은 하늘과 바다가 주는 자유와 공평, 평등, 호혜, 융합이다. 반면 고립이나 배타성, 열등의식도 부정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중광의 정신은 자비의 정신이다. 차별없이 대우하는 것이다. 교수나 창녀나, 닭이나 보살이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그에게는 동등한 대상이었다. 중광은 가난한 자에게 더 베풀었다. 돈의 개념이 없어 누가 딱한 사정을 얘기하면 주머닛돈을 모두 꺼내 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주어의 하나인 쿰다(품다)를 중광의 예술에서 발견한다. 비록 이질적이거나 차이가 있더라도 품어주는 큰 자비가 바로 쿰다이고 제주 정신의 총화이다. 중광의 자타불비(自他不比)의 정신이 곧 쿰다의 정신이다. 제주의 배타성은 중광을 끌어안음으로써 극복하고, 세계가 인정한 천재 화가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림으로써 자랑으로 삼는다면 열등의식은 문화예술의 섬이라는 긍지로 바뀔 것이다.

필자가 소장중인 중광스님 작품

필자도 고향이 섬이다. 섬사람의 공통적인 바람은 바다를 건너가는 대자유이다. 섬에 갇혀있다는 숙명 의식은 늘 출항을 꿈꾸게 한다. 중광도 자유를 꿈꾸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 어떤 재산을 모으거나 명예나 권력을 얻지 않았다. 그만큼 순수하였으며 철저히 무소유 무정처의 표상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제주에 가득한 바람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즉 소유하지 않는 참자유를 말이다.

중광은 술을 마시며 춤을 추며 줄곧 시를 읊었다. 그가 자주 읊었던 시는 「나는 걸레」와 "지금쯤 황소 타고 고향에 가면"으로 시작하는 「재입산」이다. 중광의 시에 고향은 아름다움과 거친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다. 어머니가 있고 자연과 첫 경험이 있고, 쓰라린 상처가 있다. 중광에게 귀향은 꿈에서조차 꿈꾸었던 가장 큰 소망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 개는 불교를 믿고, 우리 집 고양이는 예수교를 믿고..." 라는 시로 열린 마음을 노래했던 중광이었기에, 고향의 대자연과 아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중광이었기에 제주에게 던지는 화두는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주에 돌아오는 중광은 영등아미를 데리고 건너오는 영등할망이다. 영등바람이다. 제주의 절경을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이다.

제주는 늘 혁신해야 한다. 과거에 얽매어 아픈 기억만 더듬어서는 안 된다. 바로 장자(莊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이다. 중광이 살불살조(殺佛殺祖)하고 파법파조(破法破祖)하여 달마를 재 창조하고 예술의 정형을 깨뜨린 것이 오상아다. 과거의 나를 장사(葬事) 지내고 새로운 나를 탄생하는 것이 오상아다.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하늘을 탓하지 않는 것이다.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제주를 살파(殺破)해야만 새로운 제주가 탄생한다는 말이다.

묵은 제주를 새로운 제주로 조성하는 일에 중광은 상징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건립이 추진 중인 중광 미술관은 제주 출신 예술가의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공립 미술관이다. 전쟁이나 여행 중에 잠시 머물다 떠나간 여느 예술가들의 미술관이 아니다. 제주의 바람이 낳고 제주의 역사가 키운 진정한 제주인의 미술관이라는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제주가 꿈꾸는 세계평화의 섬을 완성하는데 포용과 자비의 아이콘인 중광화백을 불러올 것이냐 아니냐는 정치적, 경제적 논리가 아니라 순전히 제주인의 판단이라는 생각이다.

 


최계철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