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38》 천맥 - 최정희

2024-06-07     용인일보
최정희 소설가 @NAVER

최정희(1906~1990)는 1937년 「흉가」를 <조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개성있는 문학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섬세한 여성심리묘사를 통해 여성문제를 형상화하여 문단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자기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감추는 고유한 방식으로 진실을 탐구해나갔다.

1906년 함북 예동에서 태어난 최정희는 소설가로서 또 전쟁중엔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얻어 집을 나가면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작가는 자신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영화감독 김유영과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지만, 시인 김동환을 만나게 되어 남편 김유영을 떠나, 부인과 헤어진 김동환과 결혼하지만 전쟁 후 그의 납북으로 홀로 되었다.

제2차 카프 검거사건으로 불리는 1934년 신건설사 사건은 그녀의 삶을 뒤집어놓았다. 사회주의자(김유영)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회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야 했던 최정희는 9개월동안의 수감생활로 그는 지니고 있던 기독교 신념을 모두 버리고, 자신을 구원할 길은 오직 문학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녀는 작품의 주인공에 대해 “나 자신의 이야기인 것같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나는 굳이 변명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쓴 모든 소설의 주인공이 ‘나’일수도 있고 ‘나’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굳이 변명하지 않는; 여성들의 삶을 재현하려 했다.

『지맥』, 『인맥』, 『천맥』 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인 ‘결혼제도를 넘어선 연애’는 당시 지식인들이라면 한번쯤 시도했을 법한 사회현상이기도 했다. 조혼의 풍습이 남아있던 그 당시에는 지식인들 사이에 자유연애 사상이 퍼져있었다. 교육을 받느라 혼기가 늦어진 ‘신여성’들의 연애상대는 이미 아내와 자식까지 둔 유부남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당시 ‘신여성’들의 삶과 고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모두 교육받은 여자다. 이들은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갈등 상황에 빠지거나, 아내를 둔 남자와 동거하고 아이를 낳아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처절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자신의 과거를 자책하면서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게 되는데, 이는 아이를 정상 가정에서 키우기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위해 새로 만난 진정한 연인을 포기하거나.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독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정희는 서사 속에서 당시 신여성이 처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재현하면서 그의 내면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지맥』, 『인맥』, 『천맥』은 이러한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인데, 주인공들은 당시 신여성들이 그러했듯이 ‘윤리’와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아이로 인해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극심해지는데, 사회윤리를 거슬러 감행한 사랑의 결과로 겪어야 할 고통을 통해 주인공들이 선택하는 길에 다.

단편집으로는 『천맥』(1948) 『풍류잡히는 마을』 (1949) 『바람 속에서』 (1955) 『탑돌이』(1976)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 『녹색의 문』 (1954) 『인생찬가』 (1958)가 있다. 1990년 노환으로 정릉 자택에서 별세했다.

최정희, 천맥 초간본 표지  ⓒ용인일보 소장
최정희, 천맥 초간본 판권지  ⓒ용인일보 소장

<작품 소개> 주인공 연이는 아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갑자기 남편이 죽는다. 아내로 인정받지 못해 유산도 없고 생계가 막막하자 아이에게 아버지 있는 가정의 울타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재혼한다. 기대와는 달리, 남편은 연이의 아들을 못마땅해 하고 아이도 성격이 비뚤어지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나 무작정 신문에서 본 옥수정 보육원으로 간다. 거기서 어릴 적 학교선생님이었던 ‘성우 선생’을 만나게 되고, 일본과 미국유학을 마친 최고지성인으로 고아들을 돌보고 바르게 이끌며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그에게 감동해 보육원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연이는 성우선생에 대해 존경심을 넘어 애정이 커져가는 게 괴로운데 그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데다 온통 보육원아이들에게 관심이 가있어 연이의 마음을 모른다. 그렇다고 성우선생을 떠날 수 없는 연이는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아이들에게 전념하기로 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소명을 받들고 살아간다.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만 있다면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윤리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으로 아이가 내던져진 상황을 보면서 주인공은 사회의 높은 장벽을 새삼 깨닫고 심적으로 방황하다가 모성애를 선택하여 윤리와 도덕에 무릎 꿇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성애를 선택하는 배경에는 사랑이 있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이 주인공을 괴롭히기 때문에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오히려 작가는 모성애와 윤리를 강요하는 사회를 강하게 비판한다.

윤리에 대한 순응이 너무나 당연했던 당시 사회에서 윤리에 반하는 개인의 욕망을 주장하는 일은 특히 여자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를 몸소 체험한 최정희는 개인의 욕망을 빼앗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작품으로 일궈내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