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41》병든 서울 - 오장환

2024-06-22     용인일보
오장환 시인 @NAVER 

오장환(1918~1951)은 충북 보은에서 서자로 태어난 설움으로 예민하고 반항적인 소년으로 자라 늘 소외감을 안고 살았다. 휘문고보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중퇴한 후 1933년 『조선문학(朝鮮文學)』 11월호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고 곧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를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6세무렵에 "내가 수업료를 바치지 못하고 정학을 받아 귀향하였을 때 달포가 넘도록 청결을 하지 못한 내 몸을 씻어 보려고 목욕탕에 갔었지”로 시작되는 이 ‘목욕간’이라는 시는 아저씨와 함께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목욕간에 목욕하러 가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주인에게 입장 거절당하는 내용의 시이다. 이를 시작으로 오장환은 초기에 산문 투의 형식 등 여러 모더니즘 형태를 실험하는데 이것은 장시 ‘전쟁’에서 극대화된다.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강렬한 희구는 사회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한 것이고 자신의 혈통을 상징하는 성씨와 관습, 역사까지도 부정하고픈 욕망으로 이해된다.

1934년 오장환은 김기림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와 <낭만> 등에 ‘성씨보’를 비롯하여 ‘향수’ ‘면사무소’등을 발표하고 이어 1936년 ‘우기’ ‘성벽’ ‘온천지’ 등을 발표하고서 다음 해 이 시들을 묶어 첫 시집 『성벽(城壁)』(1937)을 간행한다. 이 시집은 ‘성벽’이 상징하는 봉건적 억압에 대한 반항정신을 드러내며, 문명을 빙자하여 타락해가는 부르주아의 근성을 비판한다. 이로써 오장환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라거나 ‘시의황제’라는 호칭을 얻을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의 기수인 김기림에게도 찬사를 받는다.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참여였고 이듬해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허무와 퇴폐를 벗어나지 못한 오장환은 새로운 문물을 실은 이국선들이 드나드는 낯선 항구의 거리에서 방황한다. 술과 싸움과 도박에 찌든 탕자들이 우글대는 항구에서 그들과 동화되려 애쓰지만 결국 오장환은 이곳에서도 고독과 소외만을 안고 나온다. 이 과정은 1937년과 1939년에 발표한 ‘황무지’, ‘선부의 노래’, ‘상열’, ‘소야의 노래’ ‘헌사’ ‘나포리의 부랑자’ 등에 묘사되며, 이들과 미발표작을 엮은 것이 시집 『헌사(獻辭)』(1939)다.

도시문명과 탕자들의 부두와 죽음의 늪 주위를 방황하던 오장환은 고향을 떠올린다. 그가 그토록 부정해왔던, 그러나 결코 부정될 수 없는 뿌리에서 안식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 직전 이러한 심적 상태를 모아두었다가 해방 후에 엮은 것이 시집 『나 사는 곳』(1947)이다.

1946년 임화, 김남천과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약하면서 번역시집 ‘에세닌’을 간행하고, 부르주아의 근성에 도취하여 방황하던 지난날에 대한 자아비판과 계급주의를 향한 미래를 다짐하는 『병(病)든 서울』(1946)을 간행한다.

오장환은 ‘시인부락’시절 가까웠던 서정주를 비롯하여 민족진영의 ;청년문학가동맹‘단원들을 길에서 만나면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친일파라고 비난할 정도로 단호했다. 그는 1948년 2월 월북하였고 한국전쟁 때 서울의 김광균을 찾아와 자신이 북에서 낸 시집 ’붉은 깃발‘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북으로 돌아간 이후 남로당계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오장환, 병든 서울 초간본 표지 ⓒ용인일보 소장
오장환, 병든 서울 초간본 판권지 ⓒ용인일보 소장

<작품소개> 9연 72행의 자유시로 1945년 12월 『상아탑』 창간호에 발표되었다가, 이듬해인 1946년 7월에 간행된 『병든 서울』 시집에 표제작으로 실렸다.

이 작품은 장시의 형식으로 해방의 기쁨과 혼란 속에서 느끼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해방을 맞고 한 달 뒤인 1945년 9월 27일에 쓰인 시인데,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느낀 감정을 서술적으로 풀어냈다. 시적 화자는 병실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울었다. 이때의 울음은 천황의 방송도 믿지 않고 그저 홀어머니를 두고 죽을지 모르는 자신이 부끄럽고 원통해서였다. 하지만 다음날 해방된 서울 거리에 감격의 울음으로 뛰쳐나가 본 장면은 그 기쁨을 울분과 한탄으로 바꾼다. 그것은 기대하였던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나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의 모습이 아니라 더러운 장사치와 기회주의적인 정치꾼들만 거리에 가득한 ‘미칠 것 같은’ ‘병든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시적 화자는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보았고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맑게 개인 하늘’애 떠도는 ‘젊은이의’ 꿈을 보고 싶은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이 시련을 극복해나가겠다 다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격한 감정 속에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해방된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을 적절하게 형상화하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조대안

단국대 경영학 석사
필리핀국제문화대학명예철학박사
한국고승유묵연구소장
중광미술연구소장
용인한국근대문학관 건립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