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눈

어릴 적 친구 집에서 배드민턴을 치다 공(셔틀콕)이 지붕으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놓고 배드민턴 라켓으로 꺼내려 해도 키가 작아 막무가내로 라켓을 휘두르다 생철로 된 물받이를 건드려서 녹슨 생철 가루가 오른쪽 눈에 들어갔다. 눈을 못 뜨고 아프기도 했지만 집에 말하면 혼나기만 할 거라는 생각에 물로 씻어내고 병원에는 가지 못했다. 그 후 오른쪽 눈이 나빠져 지금도 왼쪽 눈과 시력 차가 많이 난다.

그 당시 병원에 가서 세척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나는 눈이 세 개라고 믿었다. 한 개가 나빠져도 두 개가 멀쩡했다. 나만 세 개를 가진 것이 아니다. 무슨 허튼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은 세 번째 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뒤통수 머리카락이 돌돌 회오리를 만드는 부분 바로 가마가 세 번째 눈이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기도 하지만 정말 잘 보는 눈이다. 어른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했어라고 말할 때 그 따뜻함은 세 번째 눈이 감지하는 보고 느끼는 눈의 역할 때문이다. 세 번째 눈은 현상을 보는 눈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눈을 함께 지닌 눈이다. 그러기에 어떤 눈보다 소중하다.

그런데 가마가 둘인(쌍가마)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눈이 네 개다. 너무 부럽다. 개에게도 가마가 있다. 엉덩이, 팔꿈치, 목, 가슴 등에 가마가 여러 개 있다. 그래서 개는 눈이 많아 무척 예민한 것이다. 쌍가마인 경우 결혼을 두 번 한다는 설과 가마가 세 개인 사람은 집안을 말아먹는다는 등의 낭설이 있고 이를 막으려면 남의 집 숟가락을 훔쳐 오면 된다는 미신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면 눈이 많아서 생겨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두 번 한다거나 팔자가 세다는 것이 다 눈이 여럿이라 예민함에서 나오는 거라고 믿는다. 동물들은 세 번째 눈이 정수리에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온몸으로 느낀다고 할 때 세 번째 눈이 큰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을 만드신 이는 동물들에게 험한 세상 잘 살아갈 수 있게 멀리 보는 눈, 밝은 귀, 냄새 맡는 능력, 빠른 다리 등을 주었지만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보니 영 시원찮았다. 멀리 보는 눈, 밝은 귀, 냄새 맡는 능력, 잘 달리는 튼튼한 다리도 주지 않았다. 태초의 인간들은 맹수의 먹잇감이었다. 조물주는 눈이 두 개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세 번째 눈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곧 멸망할 것이라 예상했다. 세 번째 눈은 늘 깨어 있었다. 잠잘 때도 깨어 있어 맹수가 다가오는 걸 알려 주었다. 세 번째 눈 덕분에 인류는 살아남았고 이제 세상을 인간의 시대로 만들었다.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건 세 번째 눈이다. 분명 나를 쳐다본 이유가 있을 테고 할 말도 있을 테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기에 서로 빙그레 웃고 눈길을 돌린다. 내 세 번째 눈이 인지한 것이다. 2010년 대형 태풍 곤파스가 인천을 지나는 때가 있었다. 뒤늦게 창유리에 테이프를 붙이기 위해 테이프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몸이 흔들거리고 앞이 잘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때 뭔가 느낌이 이상해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는 순간 바람에 떨어져 나간 간판 판넬이 휙 내 오른쪽 귀를 지나갔다. 순간의 일이었다. 세 번째 눈이 나를 살린 것이다. 그 위기 상황에서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세 번째 눈이 위기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세 번째 눈을 잃었다. 사람들은 세 번째 눈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고 세 번째 눈을 잃어버린 사람이 대부분이다. 너무 서글픈 일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자동차가 생기면서, 컴퓨터가 생기고 휴대폰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급되면서 우리 일상은 앞만 보며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눈 두 개만으로 충분하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따라 잘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오른손을 들어 머리 뒤 세 번째 눈을 만져본다. 시력을 잃은 눈은 눈을 감고 있는 듯 내 손의 느낌마저 모른다. 세 번째 눈을 잃었다. 정말 서글픈 일이다. 앞만 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는 세 번째 눈이 다시 눈뜨기를 원하는 봄이다. 고개를 치켜들지 않아도 벚꽃의 아름다움과 그 환한 그늘을 볼 줄 알았던 내가 그립다.

 


정진혁 작가
정진혁 작가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2009년 구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수상2014년 천강문학상 수상
2013년,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현)  용인일보 편집위원 
시집 -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드디어 혼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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