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가수 외길 반백년 황혼의 향기 머금은 영원한 청춘

스무살 중반의 그는 운명과 같은 노래 한 곡으로 불멸이 되었다. 소년공 출신 대통령이 자신의 18번이라 손꼽을 만큼 모두의 마음을 울렸던 그 노래, 하지만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앨범을 하나하나 징검다리 삼아 종착지가 어디일지도 모를 자신만의 음악세계로 끊임없이 나아갔다. 노래 인생 52년,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긴 황혼의 나이지만, 여전히 그는 꿈꾸는 몽상가(夢想歌)이자 도전하는 청춘이다. 

소년공 대통령도 위안받았던 그 감성 

이재명 대통령은 1976년 겨울 12살 소년공 시절 동마고무라는 공장에서 철야근무를 하며 그 노래를 배우고 흥얼거렸다고 한다. 대선후보 시절 밝혔던 자신의 18번 노래, 바로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다.

글을 쓰는 기자 역시도 10대 후반쯤 인생곡 중 하나가 된 이 노래를 처음 접했다. 20대 대학시절엔 나 역시 그런 애달픈 사랑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는 기대(?)에 거리에서 반주가 흘러나오면 속으로 따라 흥얼거렸다. 

세월이 지나 30대, 40대, 그리고 50대가 되어도 ‘밤에 떠난 여인’이 흘러나오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아마도, 아니 단언컨대, 운이 좋아 60대, 70대가 되어 그 노래를 듣게 되더라며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순수했던 그 비련의 현장에 마음이 머물 것만 같다.

눈앞에는 벌써 그 장면들이 펼쳐진다. ‘이등병의 편지’ 노래속 입영열차에게서나 나올법한 기적소리와 철거덕거리는 바퀴음이 배경에 깔리며.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커다란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보았네/ 차창가에 힘없이 기대어 나의 손을 잡으며/ 안녕이란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서 우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 기약도 할 수 없는 이별/ 그녀의 마지막 남긴 말 내 맘에 내 몸에 봄 오면’

처연한 가슴을 달래며 겨우 곧추세워보지만, 이어지는 2절에 속절없이 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녀 실은 막차는 멀리 멀리 사라져가 버리고/ 찬바람만 소리 내어 내 머리를 흩날리는데/ 네가 멀리 떠난 후 나는 처음 외로움을 알았네/ 눈물을 감추려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네(이하 중략)’

앞뒤 기차음까지 더해져 그렇게 노래는 3절까지 ‘4분40초’나 이어진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노래 한곡에 4분40초이나 되는 러닝타임! (4분27초, 4분4초 버전도 있다. 레코드 제작사의 결정으로 노래 제목도 ‘막차로 떠난 여인’으로 바뀐 적 있다)

‘바람에 실려’가 먼저 뜨며 역주행

1974년 발매한 가수 하남석의 1집 앨범 타이틀곡은 ‘밤에 떠난 여인’이었다. 그런데 밤에 떠난 여인은 처음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유를 직접 들어보자.

“노래가 좀 길기는 했습니다. 평균적으로 보통 3분 정도였으니까요. 방송에서는 이 노래 한 곡이면, 다른 노래 두 곡은 틀겠다며 별로 다뤄주지 않았어요. 대신 ‘바람에 실려’가 먼저 히트를 쳤지요. 그 노래의 인기로 그 해 동양방송(TBC)의 ‘밤의 리퀘스트’라는 음악프로그램의 DJ로 활동하게 됐는데, 프로그램명을 ‘하남석과 함께’라고 바꾸기까지 했지요.”

데뷔앨범을 낸 그 해 하남석을 스타덤에 올린 곡 ‘바람에 실려’의 탄생 사연도 흥미롭다. 올해 6월 매스컴은 미국의 인기가수였던 루 크리스티의 부고 소식을 일제히 짧은 단신으로 다뤘는데, 그가 바로 ‘바람에 실려’로 번안된 ‘새들 더 윈드(Saddle the wind)’를 부른 원곡 가수이다.

“저를 탄생시킨 노래인데, 가수 데뷔 후 방송국에 인사하러 갔다가 원곡을 우연히 듣게 됐어요. 필이 딱 왔죠. 당시 ‘비바팝스’라는 프로그램에서 외국곡을 한곡씩 자체적으로 번안했는데, 제가 당시 제안하고 조르기도 해서 이영호PD가 직접 개사한 ‘바람에 실려’라는 곡이 나오게 됐던 것이지요.”

당시 우리의 시대적 감성과 딱 맞아떨어진 서정적 가사와 멜로디로 ‘바람에 실려’가 큰 인기를 얻자 하남석의 다른 곡들도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앨범 발표 3년째 되던 해 ‘밤에 떠난 여인’이 폭발적 역주행을 시작한다.

음반 제작회사에서는 라디오 DJ를 그만두고 가수로서 본격 활동을 강권했다. 가수 하남석을 찾는 수요가 폭발하며 1976년 6월 하남석은 결국 자신의 이름까지 건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중단하고, 본격 활동을 펼친다. 수많은 여성팬을 거느리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데뷔 앨범 타이틀곡인 ‘바람에 실려’와 ‘밤에 떠난 여인’ 두 곡과 함께 또 한곡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잊지 않으리’라는 곡인데, 하남석 작사 작곡이다. 매 앨범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적 지향의 자작곡을 담으며, 지금까지 총 200여곡을 발표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출발점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닌 우연과 행운

가수 하남석, 젊은 시절의 그를 더듬다보면, ‘럭키 홍규’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우연스러운 사건과 행운이 이어진다. 홍규? 그의 본명은 ‘김홍규’다. ‘김영규’이라는 본명 대신 ‘하남궁’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형을 따라, 1974년 데뷔앨범을 낼 무렵 ‘하남석’이라는 지금의 예명을 갖게 됐다. 

그런데 학창시절의 김홍규는 어떻게 제1세대 포크가수로 불리게 되는 그 길로 들어섰던 것일까? 역시 우연과 행운의 연속이다. 물론 타고난 끼와 함께 준비된 도전과 노력이 있었기에 ‘럭키’ 역시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굣길에 고물상 앞을 지나는데, 벽에 걸린 빨간 기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타를 칠 줄 몰랐지만, 기타를 안고 소리를 내봤다. 순간 너무 좋은 소리가 귀로 전해졌다. 고물상 주인에게 말했다. 곧 가지러 올테니 그동안 잘 보관해 두시라고. 몇 개월이 지나 결국 기타의 주인이 됐다.

“비틀즈를 비롯해 클리프 리처드,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했던 때였는데,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며 레퍼토리를 늘리고 있었죠. 그런데 그 모습이 기특했는지, 안스러웠는지 먼저 음악하던 형님이 화성학 책도 사주고 코드도 몇 개 가르쳐 줬지요.”

형님 하남궁은 김희갑 작곡 ‘보고 싶은 마음’, 번안곡 ‘음악은 흐르는데’로 꽤 이름을 날리던 가수였다. 하지만 동생이 가수의 꿈을 갖는 걸 한사코 반대했다. 자신이 가수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지만, 생계가 여의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형제가 둘인데, 너까지 가수하면 되겠느냐는 이유도 덧붙여졌다.

비록 나이는 다섯 살 차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하던 형이었다. 아버지같은 형님의 말을 따라, 가수의 꿈을 깨끗이 포기했다. 대신 외교관이란 꿈을 새롭게 가지며 명지대 영문학과에 들어간다. 그런데 대학에 가니 영어연극에 카니발까지 자신의 끼를 펼칠 기회가 많았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막상 가수의 꿈을 꺾기는 했지만, 결국 가수의 길로 이끈 것도 형님이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뒤편에 포시즌이라는 라이브클럽이 있었다. 패티김이나 정미조도 무대에 오르던 유명한 곳이었다. 형님 하남궁이 그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이다. 지배인은 대타를 구해놓고 떠나라고 종용했다. 비행기 탈 날이 임박했는데, 대타를 구하지 못했다. 하남궁은 급한 김에 적임자를 구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군대에서 막 제대한 동생을 추천했다. 

“당시 해병대를 전역한 지 한 달도 안됐던 시기였어요. 얼떨결에 큰 무대에 올라 엄청 긴장됐죠. 어찌어찌 악보를 봐가며 기타치고 노래했는데, 나름 반응이 좋았습니다. 저를 그 길로 이끈 형님은 프랭크 시내트라랑 겨뤄보겠다며 1973년 미국으로 이민, 맨해튼에서 피아노바를 운영했는데 현지에서 꽤 히트를 쳤다고 합니다.”

최고의 인생곡이 된 ‘밤에 떠난 여인’을 만나게 된 것도 당시 기타치고 노래하던 라이브 무대를 통해서다. 클럽을 찾은 손님 한 분이 당신의 목소리에 딱 맞는 노래가 있다며, 명함을 줬다. 바로 작곡가 김성진이다. 

폐결핵에 걸려 요양 떠나는 여자친구와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의 실화를 담은 ‘밤에 떠난 여인’을 완성하고도 노래에 맞는 목소리의 가수를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노래, ‘저 푸른 초원 위에…’로 시작되는 남진의 ‘님과 함께’가 전해 발표되어 큰 인기를 끌던 무렵이었다.

박제된 과거로만 향하지 않은 시간여행

추억의 노래 여행을 떠나는 KBS <백투더뮤직> 시즌2에서는 지난 10월 ‘세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몽상가(夢想歌) 하남석’ 편을 방영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이 앞서 다룬 여느 가수편과는 조금 달랐다. 

박제로 남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머물기보다는 현재 진행형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이 더욱 부각됐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래 인생 52년 어느덧 77살의 나이가 된 그가 신곡 ‘아버지의 일탈’을 녹음해 발표하는 모습도 나온다. 노래의 엔딩에 ‘작사 작곡 하남석, 편곡 하남석, 코러스 하남석, 어쿠스틱 기타 하남석, 프로듀서 하남석’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대단한 열정이다. 그래서 싱어송라이터 하남석을 지켜본 사람들은 서슴치 않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이 70줄 넘겨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옛 통기타문화와 7080음악이 대중문화 소비의 한 영역이 되어 그토록 많은 무대가 만들어졌지만, 그 시절의 감성과 추억 소비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남석은 고희를 훌쩍 넘긴 지난 2021년 ‘황혼의 향기’라는 14집 정규앨범을 내며 음악에 대한 식지않은 열정을 과시한 바 있다. 1974년 발매한 1집 앨범 이래 14집 앨범에 이르는 동안 싱어송라이터로서 발표한 곡만도 무려 200여곡에 달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끼가 많아 엘비스 프레슬리 창법을 잘 따라했고요, 주변의 성우들 흉내도 잘 냈어요. 그런데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기 위해 책을 좀 보게 되고, 생각을 하다보니, 나만의 음악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2013년 발표한 ‘몽상가(夢想歌)’는 좋은 노래를 꿈꾸며 살아가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선언이었다. ‘몽상가(夢想家)’라는 단어에서 ‘집 家’라는 한자어를 ‘노래 歌’가로 바꾼 게 눈에 띈다.그런데 자기만의 색깔만 추구하다보니 대중과 조금 멀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일기도 했다. 나만의 음악의 성을 쌓겠다는 일념 한편으로 소외된 계층을 보듬는 사회성 있는 노래를 꾸준히 만들게 된 것은 그러한 생각 때문.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환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드를 흡입하는 10대 가출 청소년에 대한 뉴스를 보며 만든 ‘거리의 아이들(2004)’, 장애우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넌, 특별한 사람이야(2010)’, IMF 당시 노숙자들의 애환을 위로하는 ‘길 위의 남자(2011)’,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통일이라는 서사를 다룬 ‘그 날을 기다리며(2012)’,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꽃다운 삶은 마친 24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을 노래한 ‘천화(天花)(2021)’ 등이 그것이다.

인터뷰가 이어지며 사슴과 같은 특유의 눈망울이 빛났다. 우수에 젖은 미성과 함께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받았던 매력 포인트다. 인터뷰 중 우연히 나온 에피소드 중 하나이지만, 남성들에게도 사랑을 많아 받았다. 하남석 노래를 좋아해 그가 한때 운영했던 혜화동 카페 ‘목마’를 즐겨찾았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도 그 중 한 분. 그런데 하남석의 매력이 1984년 KBS <가요톱10>에서 또 다른 히트곡 '우는 아인 바보야'를 2주 연속 1위로 올리며, 하남석의 인기가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어지게 했던 것. 

가객의 꿈과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우리 마음속 영원한 가객(家客) 하남석을 만난 것은 단풍이 곱게 든 가을 날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의 ‘태화산 명가’라는 곳에서였다. 숯불닭갈비와 비빔막국수가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이다. 하남석은 그가 직접 곡을 쓰고 노래말을 붙인 14집 타이틀곡 ‘황혼의 향기’의 가사 속 ‘거리에는 어둠이 낮게 내리고/ 붉게 물든 황혼이 아름다워/ 내 맘은 아직도 내일을/ 꿈꾸는 청춘인데’라는 구절처럼 원숙함과 열정을 함께 풍기는 ‘단풍청년’의 모습이었다.

곤지암 ‘태화산 명가’를 연 것은 6년 전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후배가 먼저 제안했을 때 하남석은 나이 일흔 넘어 무슨 식당이냐고 거절했었다.

대신 살고 있는 용인시 동백지구에서 ‘하남석음악연구소’를 차리고 싶었다. 하고싶은 음악작업도 하며 후배들도 양성하는 공간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안된다’고 후배가 한사코 말렸다. 

“후배는 한때 음악을 하기도 해서 대화가 많이 통했어요. 시인을 꿈꾸기도 했는데, 시보다는 소스 개발에 좀 더 일가를 이뤄, 북한강가에 메밀막국수&닭갈비집을 냈는데, 대박이 난 거예요. 지금은 본점과 분점을 자식들에게 다 넘겨주고 제주도로 내려가 시를 쓰며 국숫집을 하고 있지요.” 

바로 이성호라는 후배다. 하남석 노래의 가사도 몇편 썼다. 7년 전 공연차 제주도에 갔던 하남석은 비자림 숲 인근에서 국숫집을 하는 후배집을 찾아 술 한잔 기울였다. 그때 후배 이성호가 자신이 개발한 비법 소스를 형에게만 가르쳐주겠다면, 다시 한번 식당 오픈을 강하게 권유했다.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였다. 2019년 오픈 첫해, 곤지암 식당에 매일 출퇴근하며 소스를 직접 만들었다. 딴 사람 누구에게도 알려주면 안된다는 후배와의 비밀유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맛있다고 소문나며 식당이 자리잡은 지금은 주말에만 들러 일손을 거든다. 딸과 사위가 맡아서 운영하지만, 자신을 보고 찾는 손님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일로 바쁜 와중에도 음반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개업 초기 가게문을 닫는 늦은 밤에야 퇴근을 할 수 있었는데, 식당 바로 옆 컨테이너에 기타를 두고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런 노력 끝에 2021년 14집 앨범을 낼 수 있었는데, 항상 그랬듯이 결과물을 보면 무언가 조금씩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더라구요. 그런 아쉬움과 더 나은 결과에 대한 갈증이 계속 곡을 만들게 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요즘엔 조급함을 떨치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조금 지치는 느낌이 들 때마다 자주 찾는 동네 뒷산을 오르내리며 마음을 챙기려 부단히 노력한다. 음악의 빛깔도 조금 달라져 14집에서 선보인 ‘꽃길’과 같이 따뜻한 음악을 많이 하려 한다.

그렇게 완급을 조절해가며 오랜 여정의 후반부를 걷고 있지만, 하남석은 새로운 정점을 향해 꿈은 멈추지 않는다. ‘내 맘은 아직도 내일을 꿈꾸는 청춘인데’ 그리고 ‘기나긴 여정, 꿈꾸는 황혼이 아름다워~’라는 14집 수록 자작곡 ‘황혼의 향기’ 노래구절처럼. 

ⓒ뮤직뮤지엄. writer _ 유성욱 기자 /  photo  _조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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