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의 동화(童畵)
예술에 있어서 유치(幼稚) 그 자체는 자연 그대로인 천진(天眞)의 세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귀하게 간주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듯 어린이의 세계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어린이가 그리는 그림이 아동화(兒童畵)이고 어린이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 아동화라면 의당 안과 밖이 그 세계에 머무는 어린이가 당사자인 작가여야 어울리는데 그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천진의 단계, 유치의 나이를 훨씬 지나치고 이른바 정법(正法)의 수련과정을 거친 성인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쯤 되면 유치를 넘어선 유치가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중광처럼 엄격한 계율의 불가에 귀의하여 25년의 수련 속에서도 잃지 않고 지켜낸 정신이라면 그 작품은 예술의 최고 경지라는 역설이 성립되지 않을까.
추사(秋史)가 일흔한 살의 나이에 그것도 병중에 쓴 판전(板殿)이란 글씨가 서울 봉은사에 남아있다. 만년에 남긴 추사의 마지막 글씨이다. 인생의 만년에 이르러야 도달한 유치함이 그대로 들어나 동자체(童子體)라 부른다. 명필을 훌륭한 글씨라고 한다. 서도(書道)로서는 명필이 최고이다. 서도법(書道法)을 충실히 준수한다. 그렇다면 도필(道筆)은 어떤가. 도필은 파격해버리고 자유자재로 유희하는 글씨이다. 그런데 파격했다고 하여 다 도필이 되는 것은 아니니 도인의 글씨는 편안하고 순진무구하다. 필법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모든 법에 구애를 받지 않는 정신적인 내면의 세계를 살린다. 격외(格外)의 세계에서 창조한 순진무구하고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감히 도달하기 어려운 대단히 어려운 글씨이다. 중광은 추사의 글씨를 도인의 글씨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영아필(嬰兒筆)은 대도인에게서 나오는 글씨이다.
이를 그림에 적용한다면 유치한 그림이 최고의 그림이라는 말이 된다. 마음을 허공같이 비워 자유자재한 참 자유인이 되어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 수많은 습작의 훈련에다 수양을 거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그림인 것이다.
중광의 아동화는 천진난만 그 자체이다. 머릿속이 온갖 번뇌와 이해(利害)의 속셈으로 가득한 성인의 오물덩어리 육체에서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가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성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것이다. 낮은 산은 고향의 산이고 어머니의 젖무덤이고 발가벗은 채 웃고 있는 동자는 부끄러움 없는 무애(無碍)에 대한 동경과 가르침이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웃고 있다. 호랑이도, 말도, 고양이도, 닭도, 어둡거나 근엄하지 않고 순진무구하다. 그리고 동자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말을 건네 보고 싶고 툭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을까. 아니면 잃어버린 천진을 붓으로 소환한 것일까. 더구나 미리 무엇을 그릴지를 구상하고 그린 계획적 그림이 아니라 편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진정 중광의 그림에 박수를 보내는가. 그의 작품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그의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이 무엇인지 아는가. 닥종이에 담아낸 변화무쌍한 그림인가 아니면 힘찬 붓질로 빚어낸 글씨인가. 그것도 아니면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한 달마나 어린이 그림인가.
“1979년도 버클리 대학 동양학과 과장이 발행한 Mad monk(미친 중)이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보면 아무 그림도 없는 하얀 백지에 중광사인이 적혀있다, 이 그림은 내 그림 중 제일 유명한 작품이다. 피카소는 이런 작업을 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고 배울 수도 없으며 오직 느끼거나 깨달아야만 한다는 그림이다.”
어떤 그림 앞에서서 17초 이상만 멈출 수 있다면 그 그림은 틀림없는 명화이다. 그게 중광의 그림이다.
현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이사
현 인천 문협 이사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문학의전당)' 외 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