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天眞爛漫), 유치찬란(幼稚燦爛)에 빠지다

중광스님
중광스님 (1934.1.4~2002.3.9)

우리 시대의 천재 화가 중광을 기억하며..

1998년, 참으로 쓸쓸한 한 해였다. IMF 외환위기가 온 것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실의와 허무 속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만 하는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때 나도 황학동과 인사동을 배회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도산한 기업체 사무실과 사장실에 폼나게 걸려 숭배받던 그림과 글씨들이 폐품이 되어 황학동 고물상으로 밀물처럼 들어왔다.

불교 공부의 첫걸음이던 고승열전의 주인공들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고승 유묵(遺墨)이 막걸리 한 잔 가격도 안 되는 금액에 눈 밝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의 선(禪)을 공부한답시고 이 절 저 절 헤매며 눈 밝은 납자(衲子 ; 수행자 )들을 찾아 미혹한 눈을 맑게 한 부채가 있는 나는, 그렇게 황학동으로 쓸려 내려온 고승유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저절로 내 차례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집 목록은 중광 스님 작품 200여 점, 그밖의 고승유묵은 1000여 점을 넘어 이제는 숫자를 헤아릴 수없이 많아 여러 군데 수장고에 가득 찼다.

수집을 시작하고 몇 년 후, 중광 스님의 열반을 맞이했다. 스님의 그림보다 스님이 살다간 삶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면서 중광미술관 건립을 내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이유는 첫째, 책도 없이 스승도 없이 선화(禪畵)의 세계를 구축한 창의성과 타고난 절대색감 그리고 천진난만(天眞爛漫), 유치찬란(幼稚燦爛)에 매료되었다.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그래서 바람 같은 무애사상과 대자유인의 삶을 살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파계승(破戒僧)의 주홍글씨에 주목했다.

둘째, 절벽과도 같은 세상의 가식(假飾)과 허구와 위선의 기존 틀을 부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먼저 걸레가 되어 세상의 모든 때를 닦겠다는 엄청난 용기에 탄복했다. 가짜를 보고 진짜라고 말하고, 위선을 보고 진실이라고 말하고, 악을 보고 선이라 말하고, 누구도 정의를 말하지 못할 때 스스로 걸레가 되어 탈춤을 추듯 세상을 비웃었다.

그때 세상은 그를 파계승이라고 낙인 찍어 일주문 앞에 내동댕이 쳐졌다.

이때도 중광은 자신을 파계시킨 사찰을 위해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그림을 그려 일주문, 삼성각, 대웅전 등 사찰 중창 불사에 최선을 다해 뒷밭침하였다.

그리고 원망도 하지 않고 “중질은 내가 하는 거지 종단이나 승적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웃어넘겼다. 자신만만해 하며 누구도 그리지 않던 소, 말, 호랑이, 쥐, 양 등 동물달마를 그리고, 피카소보다 더 창의적인 도자작품들을 창작해냈다.

셋째, 모진 풍파도 삶의 흔적도 작은 전설이 되었지만 그의 곁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중광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고는 홀연히 내가 나섰다. 마침내 그의 책 <벙어리 절간 이야기>를 보고 목차의 주인공들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였다.

정지영 영화감독, 소설가 이외수, 소설가 김성동, 사석원 화백, 박영택 미술평론가, 가수 조영남 선생, 송수련 중앙대 미대교수, 이은윤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이수용 영화감독, 손우진 중광스님 양아들, 갤러리 아트링크 이경은 관장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선지자들 약 70여분의 친견을 마쳤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내가 아닌, 확신에 찬 눈으로 중광을 다시 보고, 그가 우리 곁에 왔던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약 200여 점의 중광 작품은 많은 시간과 열정으로 중고나라, 황학동 벼룩시장, 인터넷 경매사이트 등, 소위 말하는 고물상 같은 곳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작품들을 오직 내 눈으로 건져 올린 보물들이다. 훗날 이 작품들이 뭇중생들에게 희망과 위안이 되는 장소에 안착 되기를 기원한다. 그래야만 중광을 향한 나의 긴 여행이 끝날 것 같다.

 

 


 조대안
 조대안

단국대 경영학 석사

필리핀국제문화대학명예철학박사

한국고승유묵연구소장

중광미술연구소장

용인한국근대문학관 건립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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