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스님 
ⓒ탄탄스님 

인플레이션이 매우 심하여진 세상이다.물질 못지 않게 호칭도 웬만하면 누구나 회장님, 대표, 박사, 선생이다.

어느 누구는 제 서방보고도 우리 김변, 김변 하고 또 어떤 덜 떨어진 여인네는 제 서방이 목사라며 우리 목사님 우리목사님 하더라니, 점점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 되어가는 빛을 잃어가는 세상이 맞다.

뭘 좀 배워야 얻을 수 있는 직업들이 다들 흔해 빠져서는 직업윤리는 온데간데 없으니,모두가 미쳐 구한말처럼 돈을 주고 양반이 되어져서는 돈주면 학벌도 사고 돈을 주면 어디 안되는게 거의 없으니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고 눈이 뒤집혀 환장하는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 뭘 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선생으로 다가오신 어느 한 분 께서 오늘 또 유명을 달리 했으니, 요즘 눈뜨면 한 순간에 별세의 소식의 잦아지는 거다.

모두가 살기 싫어진 세상인가? 의학이 저만 살려 한다고 의료혜택에서 멀어져 현실에서 더는 살지를 못하고 그리들 훌쩍들 떠나려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하늘이 중생계에 더 좀 머무르면 좋을 사람들을 미리미리 절실하게 더욱 필요하여 요긴하게 재생하려고 속히속히 스카웃 해가는 것일까?

부처도 예수도 인류의 선생이신 분인데, 어느 한 날 이사바세계에서 내 인생의 선생이신 어느 한 분이 있었다.

개나 소나 모두가 회장이고 구멍가게의 대표님도, 여기저기 박사님도 넘쳐나지만, 돈을 주면 있는 죄도 무죄로 만들어 준다는 대형로펌 오물덩어리 변호사도 아닌데, 인생의 지침을 주시는 어느 한분이었는데, 몇 시간전에 통화를 하고 농담도 하고 약속도 잡고는 했는데, 저녁 잠자리에 들더니만 그냥 아침에도 깨어나지 않고 영면 하신 분이다. 영주가 본향이시기에 나도 내 마음속의 고향 영주를 내 12대 중시조 추월당 선생의 봉현면 노계서원을 간직한 처지여서 영주가 낳은 선비로 퇴계의 제자로 소고 반남인 박승임의 후손이라기에 무조건 두목처럼 모시고 따른 박찬효 선생.

전통은 사라지고 상술이 난무하는 허무의 거리 인사동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승속과 나이를 초월하여 쌓아 온 우정의 성곽이 하루 아침에 허물어져 황성옛터에 그 밤처럼 월색만 고요하더라니, 조선시대 영주는 안향을 제향하는 최초의 소수서원이 있었으며 우리 추월당 할아버지가 살던 풍기땅 풍기군수 겸 춘추관 편수관에 임명되신 소고 박승임 양반의 후손이 박찬효 선생이시니 뼈대있는 반남 박씨 가문의 핏줄로 나신 것이다. 어느 무료한 시간에 졸문을 보내 신세 한탄을 좀 하였더니 댓글로 "인생 참 고달프다"며 그러나 오히려 나에게 화이팅 하라고 따듯한 위문을 하시었더라.

내가 이래뵈도 팔삭동이 한명회 대감과는 촌수로 따져봐도 무려 28촌이다. 예전에 계유정난때 태어났음 더 가까이서 뵈옵고 말석으로라도 겨우 참가하여 공신이 되보려 손에 피도 묻혔을꺼라고 아니 이도저도 아니었으면 충의를 지키려 단종의 옛 신하들인 사육신의 머리짤린 시신을 처리하는 공이라도 지어 내 후손일랑 미관말직 어느 한적한 궁지기 자리라도 얻어 호구지책이라도 했을지 모르테지만, 이 몸은 시대를 잘도 태어나서 궁지기는 아니어도 밥술은 겨우 먹고 한세상을 그저 풍미하며 선인들의 오랜 한적이나 더듬거리며 들여다 보고 덧 없이 세월을 보내던 잠깐 무렵에 인사동 그 허전한 거리에서 박사보다 더 품위있는 밥사 박찬효 선생과의 훈훈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세상인연이 또 눈 깜짝할 사이에 마무리 되어지는 갑다.

바이러스가 난무하고 사방이 링인 이세상에서 날이 갈수록 기운도 빠지고 거울 속 초로의 나의 모습도 아쉽지만,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움에 응대해야 하고 그러나 반듯이 싸움에서는 이겨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자연의 섭리. 즉 산다는것이 싸움인줄 왜 몰랐는지, 이제서야 바짝 정신을 차려보고 나니 내 인생은 싸움에 패배하여서 코피가 터져 선혈이 줄줄 흐르고 있다는 거다.

특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또한 과도한 경쟁에서도 밀리고 도태되어 링위에 널부러진 한 사내의 처참한 패배는 예전엔 제법 맵집도 있었고 한 두대를 거져 맞아주는 척하다가 어쩌다가 한번은 휙하고 가볍게 날린 잽인지 훅에 몇 놈쯤은 때려 눕혀도 보았는데, 이제 우리들 인생의 후반전에서는 다소 늦은감이 있어도 더 강해져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찬효 선생님 영전에 마지막 분향을 정성을 다해 올리며 이제는 쉬지 않고 아침이면 케튼벨을 쉰 네번쯤 쉬지 않고 들어보며 강렬한 싸움에 의지를 다시 불태우려 한다.

산 자들은 살아야 하고 죽은 당신들은 한때 추억을 같이 했던 우리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어 주길 기원하면서,박사 보다 밥사의 길이 더욱 의미 있음을 진작하여서 그 실천에 몹시나 주력하던 박찬효 선생 다시 되새겨 경북 영주의 명문가문에서 탯줄을 이으시고 이 비정하기만한 서울에서 갖은 고초와 고생끝에 초년엔 실패도 여러 번을 하였지만,인생 후반기 들어서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꾀하고는 삶도 점점 나아지고 기름져 지시나 했더니 또 말년에 사업에 고전하고 어려움에 봉착하여 고전에 고전을 하셨다.

그러나 인사동 나들이를 삶의 행복으로 여겨 선조님네의 문집이나 골동수집으로 낙을 삼으시다가 어느 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대중문화예술인들에게 자신의 쌈지돈도 아낌없이 풀어 밥도 사고 술도 사던 무작정 호구는 아니어서 호인배로 우리 지인들 몇은 이를 모두 다 기억 할 꺼다. 술값, 밥값 조차 아까운 쫌생이들에게는 귀감이 되시고 푼돈 밥값에 벌벌떨며 살고있는 그런 위인들과는 사뭇 대인배이시고 인사동거리를 풍미했던 선비의 고장 영주가 낳은 박찬효선생 기꺼이 행님이 되어주고 오빠야가 되어서는 우리가 살던 잠시 찰나의 세월이 오래도록 기억되어져서 인생 그깟이꺼, 지나고 나니 덧은 없지만 밥먹고 술마시던 늘 "잘 생기신 것이 죄라"며 잘나긴 했지만 잘나서 잘난 척한 그 깜찍한 죄를 이제야 사하여 드리오니 인사동이 허물어져 온데간데 없어도 그 흔적 위에 우리들이 잠시 나눈 우정과 사랑 한 가운데 우리들의 밥사 박찬효 선생과 함께 하였음을 늘 기억할 것을 새기며 영전에 분향을 올리오니 편히 잠드소서.

일장춘몽인 인생을 돌이켜 꿈을 깨어보니 또 꿈이었더라.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추월당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고모도 큰어머니도
박찬효 선생도 향년72세 이시었군요.

 

탄탄스님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스님 용인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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