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뒤 맑은 날
중앙공원 포장된 도로말고 흙길에서 웬 놈이 내게 한 판 뜨자면 덤벼든다
이런 괘씸한지고,
어쭈구리 당랑권*을 하려는듯
폼도 그럴싸 하다
제 몸의 수백배인 내게 겁도 먹지 않고 달려드니 일순 내가 참아야 했다
내 겁이나서 돌아서는 거 아닌데
내 더러버서 참는데도
웬지 뒤돌아서 다시 바라보니
이 놈이 승리에 도취하여
의기도 양양하게 보무도 당당하게
제 갈길을 잘도 간다
*자기 능력도 가늠하지 않고 강적에게 무모하게 덤비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있다. 당랑거철螳螂拒轍과 혹은 당랑지부螳螂之斧,장자에 나오는 우화로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라는 말이다.
중국 제나라 임금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가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치켜들면서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든다는 말이 ‘당랑거철螳螂拒轍’이다.
"허 맹랑한 놈일세! 저게 무슨 벌레인고?”
"사마귀라는 벌레입죠. 앞으로 나아 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을 모르는 놈입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벌레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용맹스러운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벌레가 상하지 않도록 수레를돌려 가도록 하라”
장공은 미물이 앞뒤前後를 돌아보지를 않고 제 존재를 드러내어 달려드는 모습에서 용맹성을 본 것이다. 제가 가진 모든것을 버려 뜻을 세우고 구하는 일은 미물일지라도 기릴만하다.
장자는 “무실無失이면, 무득無得”이라고 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얻을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매사에 물러섬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의 어리석음이 밉지는 않겠지만, 제 분수도 잊고 달려오는 수레를 막아선다면 그 운명은 어찌되겠는가. 어리석은 사마귀처럼 제 처지나 분수를 잊고 무모하게 대드는 사람을 빗대어 “당랑지부螳螂之斧” 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나서야 할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아니면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지, 그 분별을 모르고 일삼아 억지로 나서면 화를 부른다.
“훌륭한 장수는 섣불리 나서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궁구한다.
그리하여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 자 뒤로 물러난다.” 고 노자는 말한다.
“기심화심機深禍深”이란 말이 있다. 배포가 크면 재앙도 깊다는 말로 크게 왕창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좋아 보여도 재앙의 기틀을 밟으면 돌이킬 수 없다.
경적필패輕敵必敗, 모든 것을 가볍게 보지 말라. 오만은 반드시 망한다.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저항하지 않고, 수레 옆으로 피한다면 살아남지 않을까?
좀 더 비약해서, 독재자에게 저항하지 말고, 독재자의 말을 들어주는 척 한다면 제 한몸을 보신保身하지 않을까?, 강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가의 권력이다. 청동기 시대에 고대 국가의틀이 형성되었으며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예리해진 칼과 수레를 끄는 말이 길들여졌다.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진다. 많은 사마귀들이 수레에, 혹은 말을탄 장수의 칼에 죽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독립투사들이 고문을 받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권력은 맞선다고 이길 수 없었다.
어쩌면 당시의 독립투사는 사마귀처럼 무모한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군부독재 시절엔 수 많은 민주화 인사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歷史의 수레바퀴에 수많은 민초들이 깔려 죽었다. 그렇다면 역사는 과연 강한자들의 편이었는가 권력과 맞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감행한 이들을 누가 기억해 줄까?,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서 수레가 지나간 다음에 다시 나타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짓이 아닐수도 있다.
그리하여 무모한 사마귀의 어리석음을 따르지 말 것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앗을 쓰려뜨린 어린 목동도 있었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며 약자는 흔적이 없이 사라질 뿐인듯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무모함과 거대한 수레에 맞서려는 사마귀의 용기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투사들을 잡아 족치고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이들이 해방정국에서도 단죄되지 않고 그 후손들은 호의호식을하고 산다며, 강한것에는 굽히는것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모르지만, 정의는 척박한 환경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려는 의지에서 바로 세워지는 것이리라.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늙은 백작은 인간성의 한계를 자각한 뒤에야 이렇게 읊었다.
“눈이 보일 적에 나는 오히려 헛디뎌 넘어지곤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는 조심하는 까닭에 넘어지지 않지만, 눈 뜬 자는 오만함과 경솔함 때문에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지는 법이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 나태해지고, 역경과 시련 속에서 단련된다는 것이다.
맹자에 나오는 “생어우환生於憂患,사어안락死於安樂이란, 지금 어렵고 근심스러운 것이 나를 살리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금 편하고 즐거운 것이 나를 죽음의 길로 인도 한다고 말했다. 우환과 고통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성공을 찾아내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이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견디면서 이렇게 말했다.
“빈곤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툭 틔워 주고, 인정물태人情物態(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 물정)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 준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물 안에서 헤엄쳐야 할 제 운명을 원망하지 말고, 사랑함으로써 마침내 헤엄치기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 연鳶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 가장 높이 날고, 바람개비가 돌지 않으면 아이들은 막 달리지 않던가, 스스로 뛰어서 바람을 만든다. 당랑거철과 당랑지부의 두 힘을 균형 있게 조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절이다.
출전
「齊莊公出獵, 有一蟲擧足將搏其輪, 問其御曰, 此何蟲也. 對曰, 此所謂螳螂者也. 其爲蟲也, 知進而不知却, 不量力而輕敵. 莊公曰, 此爲人而必天下勇武矣. 廻車而避之.
제(齊)나라 장공莊公이 사냥터로 가던 도중에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고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에게 물었다. “저건 무슨 벌레인가?” “사마귀라는 벌레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 모르며, 제 힘도 가늠하지 않고 적을 가볍게 보는 놈입니다.” 장공이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수레를 돌려 피해 가도록 하라.”」
이 이야기는 《회남자淮南子》와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온다. 양梁나라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에 실린 진림陳琳의 〈위원소격예주문爲袁紹檄豫州文〉에도 이 성어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