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튀어 나가 자태를 자랑하고 싶어 머리를 바투 내미는 화사한 봄을 마다하고 무서리 내리는 가을에 홀로 피는 국화(菊花)는 오래전부터 선비의 꽃으로 사랑받아왔다.
고고한 기풍, 굴하지 않은 절개, 심지 깊은 정절, 의로움을 지켜내며 꺾이지 않는 모습은 초야에 묻혀 비록 팍팍한 삶을 살더라도 기품과 절개를 잃지 않는 선비나 처사를 닮았으니 은일화(隱逸花)요, 은둔화(隱遁)요. 매서운 서리를 이겨내니 그 꿋꿋함은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선 오상고절(傲霜孤節)이다.
국화꽃은 신이 만든 꽃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든 꽃이라고도 한다. 국화를 장례에 ‘추도’의 의미로 이용하는 것은 인생을 잘 마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 편히 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화의 원산지는 중국으로 유럽에 도입된 것은 17세기였다. 주로 장례식에 사용되고 무덤에 놓여졌다. 국화가 처음 미국에 전해진 것은 유럽보다 약간 늦은 1798년이었는데, 미국에서는 가을꽃을 대표하는 꽃으로 큰 인기를 끌며 컨테이너 식물로도 널리 재배되었다. 미국에서 국화는 기쁨과 긍정의 의미가 부여돼 집들이 선물, 병문안 꽃다발, 코르사주로도 인기였고 한다.
동양에서는 국화를 황화(黃花) 또는 황예(黃蘂)로 부르기도 하는데 인간 최고의 군주가 황제이듯 꽃들의 최고라는 의미요. 또 동리(東籬), 동리군자(東籬君子), 동리가색(東籬佳色)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간 도연명의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비롯되었다. 또 불로장생의 의미로 국화차나 국화주를 마시면 장수한다고 믿기도 했다. 영초(齡草), 옹초(翁草), 천대견초(千代見草)라고도 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환갑이나 진갑을 맞은 이에게 헌화하기도 했다. 도교에서는 장생불사약이요, 신선들의 선식(仙食)이라고 여긴다. 중국, 일본에서는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에 국화주를 만들어 산에 올라 장수와 풍요를 기렸다.
정약용은 유배지의 일속산방(一粟山房)에 48종의 국화를 심어놓고 감상하였다.
그의 국영시서(菊影詩序)라는 글에서 “국화는 뭇꽃들 가운데서 빼어난 점 네 가지가 있는데 늦게 피는 것이 그 하나요, 오래 견디는 것이 그 하나요, 향기로움이 그 하나요, 곱되 요염하지 않고 결백하되 차갑지 않음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 네 가지에 하나 더 촛불 앞의 국화 그림자를 취한다. 밤마다 그것을 위하여 담장 벽을 쓸고 등잔불을 켜고 그 가운데 적막하게 앉아서 스스로 즐긴다.”하였다.
중국 위나라 장수였던 종회(種會)의 국화부(菊花賦)를 빌리면 밝고 둥근 것이 높이 달려있어 하늘을 닮았고, 노란색이니 땅을 닮았고, 일찍 심었으나 늦게 피어나니 군자를 닮았고, 눈 서리를 이겨 꽃을 피우니 의지가 굳고, 술상에 꽃잎을 띄워 마실 수 있으니 멋스러워 좋으니 곁을 지켜주고 위로해주는 든든한 동지처럼 생각이 되었을 것도 같다.
다산의 국화를 심어 가꾸는 즐거움과 채국동리하(采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하며 마음을 다스렸던 도연명 선생과 무엇이 다르랴. 은자는 세속과 함부로 벗하지 않으니 추위 속에서도 늦게 그리고 외롭게 꽃을 피우는 국화야말로 속세를 벗어나 고독 속에 묻혀 홀로 정진하는 자신의 처지와 닮았으니 애틋한 동병상린을 느꼈을 것이다. 또 은둔하는 은자끼리는 시대가 달라 서로 만나거나 대화를 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통하는 문이 있는 모양이다. 사방이 고요한 적막한 시간, 홀로 깨어나 있는 시간은 서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국화를 좋아하고 은자의 꽃이라 했던 선비들, 그러나 사실 서리가 내려도 시들지 않는 꽃이라면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는 불행한 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우리네의 선비들은 속세의 이치를 거부하며 사는 자신과 같아 더욱 가까이하였던 것은 아닐까? 은일사상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인간의 걱정 근심을 해소할 수 있다는 노장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조선시대 중, 후기에 정치, 사회가 혼탁하였을 때 은둔 선비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을 의롭게 생각하였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심신을 수련하면서 후일의 정사를 도모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심경은 당시의 산수 ․ 화훼화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은일화는 말 그대로 속세를 떠나 숨어있는 꽃이라는 뜻이니 은일이나 은둔의 대표적인 노장(老莊)사상에 닿는다. 노장사상이 은둔, 운명론, 허무주의 대책없는 도피 등 부정의 이미지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회와 문명의 타락, 욕망에 의한 사회적 폐해, 사상과 가치혼란으로 범벅된 사회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고 무지와, 무욕, 무위의 자세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내적 도덕성, 즉 인본(人本)에의 회귀를 지향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의 최고 목표는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세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었다. 특히 파벌과 쟁정, 암투가 난무한 사화(士禍)와 관련되거나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관료사회의 허무함을 절실히 체험한 이들에게는 막연한 현실도피가 아니라 후세를 양성하거나 심신수양의 자회(自悔)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겁한 부와 명예에 급급하지 않으면서 지조를 지키고 몸과 마음을 수련하며 자연의 섭리 안에 살아가려는 삶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의(義)와 인(仁), 신(信)이 사라진 살벌한 사회가 되었다. 아파트 베란다 한편에서라도 국화 한 송이를 키워봄이 어떠랴. 비록 몸은 여기에 메어있더라도 마음은 속세를 떠난 은둔 처사가 되어보는 것이다.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