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부터 간간히 세심록이라 이름하여 써 모은 글이 벌써 책 한 권 분량을 넘었다. 그래봐야 손톱의 때만 한 지식과 발목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야라서 그야말로 막막한 세상을 눈감고 더듬는 초라한 수준의 글이지만 만족한다. 가끔 꺼내보며 정말 내가 그런 글을 썼는지 스스로 놀라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시절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예리하게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나 한다.

사람마다 형태와 직업, 그리고 자라온 환경이 각각 다르니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어서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고대 철학자 에피할모스의 말처럼 이는 이대로 족한 것이리라. 내가 그들일 수 없듯이 나 또한 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이 타당하다. 내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한다면 아니 될 말이다. 마음에 없는 짓을 하면 나 역시 병이 생긴다.

세심(洗心)은 자꾸 굳어지고 더러워지는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인데 과연 그러한지 되묻는다. 제도나 정치, 환경의 탓이 아니라 내 잘못의 원천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마음으로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바로 세심(洗心)이 아니랴 한다. 하지만 어제 방을 닦았다고 해도 오늘 또 더러워지니 평생 쉼 없이 해야 할 일이다.

나는 혼자, 그것도 조용히 관(棺)에 묻힐 것이다. 이 세상에 살려고 온 모두가 그랬다. 설사 모두 관에 묻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혼자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 정식으로 유서(遺書)와 자제문(自祭文)은 쓰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쓰게 될 것이다. 지난날 써 놓은 그 글들은 훗날 쓰게 될 유서와 자제문과 연결될 것이다. 아니 쓰기를 잊지 말기를, 그리고 비장하고 처절한 심정이 아니라 담담유유(淡淡悠悠)한 상태에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다녀감을 바람에게 남긴다. 구름에게 남긴다. 그렇다. 수백만 년의 시간 중 유독 이 시기에 유독 이 나라에서 이런 환경으로 태어나 이렇게 살다 가야 할 필연적인 까닭이 있으리라. 마음을 씻을 때 나는 이 소리는 내면의 소리이면서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하는 소리이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나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

이제는 더욱 마음을 다스려야 할 때라는 것을 절감한다. 70년 가까이 혹사당한 마음은 몹시 피곤하고 병도 들었을 것이다. 피곤한 것은 게으름으로 나타나고 병든 것은 편협하거나 마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발을 막는다. 마음은 정신의 주인이 되니 고요하거나 바쁜 것이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불도, 파도도, 고요함도 그렇다. 불은 내가 길어 온 물로 끄고 파도도 내 힘으로 잠재워야 한다.

증오와 아집으로 삐져나온 불안한 마음을 달래어 중화시키는 것이 치심(治心)이고, 세심(洗心)이고, 수양(修養)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어둡고 습한 무대를 찾아 서성거리거나 권외(圈外)에 머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명리(名利)에 분분하지 말아야 하지만, 적빈(赤貧)일 필요도 없다. 일부러 상대를 밟지 말아야 하지만 이유없이 상대에게 밟히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뭉게구름이 피었다 지듯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은 바뀐다. 맑고 고요한 호숫가에 서 있다가도 금방 검은 폭풍우 속을 헤맨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경계해야 할 단어는 간사, 주책, 망령, 아첨, 푼수, 참소, 이간, 간특, 교활, 무사, 음흉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단어는 염퇴(恬退)이다. 죽을 때를 포함하여 물러날 때에 이르러서는 담담히 물러나야 함을 아는 것이다.

수정(守靜)이다. 고요함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태초의 자연이 그렇듯 마음이 흔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지명한(知命限)이다. 타고난 내 수명의 필연적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순천도(順天道)이다. 천지 만물은 때가 되면 스러진다는 철리를 배우는 것이다.

신독(愼獨)이다. 홀로 있을 때 더욱 삼가고 조심할 일이다.

막기심(莫欺心)이다. 마음에 그 어떤 속임이 없는 것이다.

사무사(思無邪)이다. 마음에 거짓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서기(恕己)이다. 무오어기(無惡於己) 이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악하지 않는 것이다.

자억외(自抑畏)이다. 마음을 억제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이다. 근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하고 즐거움은 나중에 나누는 것이다.

지연과 학연, 혈연의 덕을 보지 못하고 졸하게 될 아비가 하나뿐인 딸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줄 말은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은 있는지 묻는다. 성실과 근면, 정직, 겸손을 재산으로 삼아 살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러했는지, 정말 그리 살면 된다고 아직도 믿는 것인지, 순수한 아이를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이를 먹으니, 체력도 그렇거니와 만남도 점점 시들해져 가고, 밖에 관한 관심 또한 식어간다.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 나를 지탱해 내지 못한다면 이제부터의 시간은 무의미할지도 모를 일이다. 중광스님처럼 허공창(虛空窓)을 열어놓고 무공적(無孔笛)을 불며 지낼 수만 있다면 한다. 그러자면 먼저 허공창을 매다는 법과 무공적을 부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며칠 전에는 장락(長樂) 이란 글자가 새겨진 작은 돌멩이 하나를 얻었다. 지금 내 나이에는 일인장락(一忍長樂)이 아니라 무욕장락이 맞는 것 아닌가. 닦고 또 닦으면 이 무거운 마음이 언젠가는 비워지겠지 한다.

 


최계철 
최계철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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