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03월 발매된 음반 <김의철 노래모음>은 김의철의 첫 독집이다. 김의철은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경계를 넘나든 뮤지션이다. 대중성보다 음악적 성취를 중시했기에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전설이다. 김의철의 음악은 젊은 날의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이자 결과이며 가족, 친구, 사회에 바치는 따뜻한 사랑의 노래다.
625전쟁 때 함경도 원산에서 피난 내려온 부모의 3남3녀중 다섯째로 부산에서 태어난 김의철. 부친은 원산에서 건축업을 크게 벌이며 많은 성당을 건축했을 만큼 유복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중3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며 부모는 재기를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 형제들도 모두 외국으로 떠나고 홀로 한국에 남아, 어릴 때 크게 다쳤던 다리로 8번의 대수술을 받으며 견디기 힘든 고통과 외로움과 싸워야했던 그를 지탱시켜준 건 바로 음악과 종교(가톨릭)였다.
셋째누나가 대학에 들어가며 구해온 천원짜리 기타소리에 매료된 김의철은 기타에 빠져 중3때 이미 10여곡을 작곡했을 정도로 음악성을 타고 났다. 고1때부터 삼촌집에 얹혀살면서 기타만 끼고 살았다. 형제들은 모두 좋은 대학 나와 유학까지 간 반면 김의철은 수업부족으로 고등학교도 졸업 못할 지경이었다. 부모가 의절을 경고하자 견디기 힘든 심신의 고통으로 가출하기도 했지만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오히려 예술혼은 치열하게 타올랐다. 온통 세상이 멜로디로 꽉 차있다고 느낄 만큼 음악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유일한 독집LP에 수록된 모든 곡들은 당시의 범상치 않은 감수성과 음악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김의철은 고등학교때부터 세션작업에 참여했는데 김동석의 음반작업세션을 맡으면서 그의 기타솜씨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독교방송 김진성 PD의 권유로 포크여가수 방의경이 진행하던 인기절정의 청소년프로 <세븐틴>에 첫 방송출연을 했다. 이때 부른 노래가 고1때 작곡한 「불행아!」였다. 범상치 않은 기타실력과 시적인 노랫말을 서정적인 멜로디에 얹는 작곡솜씨와 노래에 방의경은 매료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방의경의 노래반주는 김의철이 도맡아 해주었다.
카톨릭 신자인 김의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3년부터 명동성당뒤 카톨릭여학생기숙사의 포크 동아리인 <해바라기>의 리더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중들이 기억하는 이정선, 한영애, 이주호, 김영미의 4인조 혼성포크그룹 <해바라기>도 여기에서 탄생했다. 김민기, 현경과영애, 양병집, 정태춘, 이광조등이 이 당시 우리 노래운동에 동참했던 멤버들이다. 해바라기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YWCA 청개구리와는 달리 노래로 의식화운동을 했던 청년저항 문화의 산실이었다. 젊은 관객들로 해바라기가 항상 북적거리자 유신정부는 리더 김의철에게 사퇴압력을 가하며 정보원들을 해바라기에 상주시키는 바람에 성당에 피해를 줄까봐 김의철은 75년 이정선에게 진행을 넘기고 물러났다.
1973년 초 보성고교 졸업을 앞둔 김의철에게 그의 음악성을 알아 본 오리엔트의 나현구 사장이 음반제작을 제안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박찬응, 양희은, 김민기, 이정선, 김광희, 윤형주 등 선배와 동료 뮤지션들이 기타, 피아노, 비브라폰, 클라리넷 연주와 코러스에 참여해 이틀만에 녹음을 마쳤다. 그러나 이 음반은 녹음 직후 발매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1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발표됐다. 김의철의 노래들은 어두웠다. 판매를 의식한 제작사가 김의철과 상의도 하지 않고 노래 제목과 가사를 수정해 앨범을 발매했기 때문에 분노한 김의철은 스스로 음반사에 데뷔 음반 판매 금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수록곡은 연주곡을 포함해 총 10곡이었다. 타이틀곡으로 염두에 둔 「불행아!」는 노래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가사가 길다는 이유로 「저 하늘의 구름따라」로 제목이 바뀌어 2면으로 밀려났다. 가사도 ‘갈 수 없는 신세’가 ‘갈 수 없는 이 몸’으로, ‘흙 속으로 묻혀갈’이 ‘흙 속으로 헤어갈’로 수정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다. 이 노래는 김광석이 「다시부르기2」를 취입하면서 원제목 「불행아」으로 다시 불러 존경심을 표했던 포크 명곡이다.
타이틀곡 「마지막 교정」은 졸업 시즌을 대표하는 곡으로 한동안 방송을 탔다. 김의철이 고등학교 졸업식날 방송실 친구가 노래를 하나 부르라하여 즉흥적으로 제목도 없이 만들어 불렀던 노래다. 선생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렀던 학창시절의 추억과 아픔을 담고 있는 명곡이다.
10곡중 유일한 번안곡인 「연인들의 자장가」는 미국 포크 가수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의 「Hobo’s Lullaby」가 원곡이다. 「저 하늘의 구름 따라」는 양희은, 윤연선, 양병집, 이광조, 김광석 등 수많은 포크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한국 포크의 명곡이다. 「우리의 꽃」은 무궁화 꽃에 대한 사시사철의 느낌을 전한 김의철식 애국가다. 서정적 멜로디에 숨겨진 저항의식을 읊조리듯 들려주는 중저음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이 음반에는 서강대 영문과에 다니던 여대생 가수 박찬응이 소름끼치는 허스키 창법으로 노래한 2곡을 수록했다. 특히 「섬아이」는 한국 포크의 컬트로 평가받는다. 인생의 애환이 서린 듯 가슴을 후벼 파는 거칠고 처연한 박찬응의 노래는 ‘창법 미숙’이란 황당한 이유로 금지됐다. 오늘날 ‘한국 포크의 컬트’로 추앙받는 그녀의 노래들이 바로 이 음반을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는데 말이다. 박찬응은 이후 판소리의 대가로 변신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한국학 교수가 되어 우리의 소리와 얼을 세계에 알렸다.
김의철은 군사독재 시대였던 한국을 떠나 17년동안 독일과 미국에서 클래식과 기타를 배웠다. 좀 더 좋은 작곡을 하고 싶어서였다. 세계기타협회 회장이었던 스페인의 나바스코스와 전설적인 세계적 클래식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기타리스트가 김의철이다. 클래식 작곡에도 열심인 그가 꿈꾸는 음악은 아름답고 품격있는 우리가곡의 맛을 풍기는 클래식포크다. 포크의 순수한 본연의 정신을 고수하며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음악적 성취감만을 위해 꿋꿋하게 삶을 견지해온 아티스트이다.
김의철 노래모음(1974, 성음 오리엔트 프로덕션)
저 하늘의 구름따라 (원제:불행아) 김의철 작사·작곡
저 하늘의 구름따라 흐르는 강물따라
정처없이 걷고만 싶구나 바람을 벗삼아 가면
눈앞에 떠오는 옛 추억 아아 그리워라
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외로이 걸으면
그리운 부모형제 다정한 옛친구
그러나 갈 수 없는 이몸
홀로 가야할 길 찾아 헤메이다 헤어갈 나의 인생아
헤어갈 나의 인생아
헤어갈 나의 인생아
깊고 맑고 파란 무언가를 찾아 구름따라 강물따라
하염없이 걷고만 싶구나 바람을 벗삼아 가면
눈앞에 떠오르는 옛추억 아아 그리워라
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외로이 걸으면
그리운 부모형제 다정한 옛친구
그러나 갈 수 없는 이몸
홀로 가야할 길 찾아 헤메이다 헤어갈 나의 인생아
헤어갈 나의 인생아
헤어갈 나의 인생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