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산-할미산성(선장산)-향수산-문수산
시작은 창대했다! 우리 능력의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는.
철녀 삼총사는 용인시박물관에서 시작해서 석성산과 선장산(할미산성)을 거쳐 향수산과 문수산으로 해서 정몽주선생묘역까지 산 네 개를 주파하는 산행을 하기로 했다. 여러사람 말을 들어보니 4시간이면 충분하다해서 우리의 찰리(영화 '미녀 삼총사'의 대장)에게 1시쯤 정몽주선생묘역으로 우리를 태우러 와 주십사 부탁까지 해놨다. 1시반쯤 내려와 좋은 데서 우리의 장정을 축하하며 늦은 점심을 거하게 먹겠다는 매우 완벽하고 야심찬 계획이었다.
9시 정각에 만나 박물관 옆길로 올라갔다. 2코스보다 1코스가 거리가 더 짧아 택했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기만 하는 완전 경사로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산을 오르는데 마지막은 정상까지 그저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 난간을 붙잡고 끌어당겨 몸을 밀어 올리며 땀을 빼다보니 드디어 정상. 1시간 걸렸다. 동백지구와 기흥역너머 저 멀리까지 다 보인다. 동백 사는 철녀 2가 큰 건물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녹지도 많고 아파트단지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살기 좋아 보인다. 단 번에 용인의 한 쪽을 다 꿰었다.
할미산성을 향해 진격. 정상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한참 내려가다 보니 길을 잘못 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내려가기만 하는 게 수상해서 다시 올라가며 좌우를 살피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물어보지도 못하고 어떡하나 고민할 때, 마침 올라오는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귀인이다! 할미산성 가는 길을 물어보니 자신 있게 가르쳐 주신다. “조금 내려가다 왼쪽으로 꺾으세요.” 우리는 거기를 지나쳐 죽 내려갔던 거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걱정 없이 가다보니 산이 도로로 잘라진 곳에 다리가 있다. ‘성산교’다. 중간에 유리처럼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 놓은 곳이 두 군데 있다. 무섭다고 그 부분을 멀찍이 피해 난간에 붙어 엉금엉금 가는 철녀 1을 놀리며 보란듯이 철녀 2와 3은 일부러 그 부분을 밟으며 걸어갔다. 발밑에 씽씽 달리는 차들을 내려다보는데 좀 싱겁다. 투명한 부분 바로 아래 시설관리 목적인 듯 강철 지지대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투명판 아래 아무것도 없어야 씽씽 달리는 차들을 직접 보면서 허공을 걷는 기분이 실감날 텐데.
다리를 건너 할미산성으로 올라가보니 발굴 공사가 한창이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길 따라 꼭대기로 올라가니 선장상 정상이다. 산 두 개 클리어! 이제 향수산으로 가면 되는데 길을 모른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두 개 있는데 둘 다 동백의 아파트단지 이름이다. 향수산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또 난관에 부딪혔다. 오늘의 일정을 계획하면서 우리 중 아무도 이 길을 가본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는 철녀 2에게 철녀 3은 큰소리 빵빵 쳤었다. “설마 길 몰라서 못갈까. 당연히 표지판이 있겠지. ” 그런데......... 정말 표지판이 없다!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저 아래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군인처럼 씩씩하게 줄지어 올라온다. 이렇게 산 꼭대기까지 올라왔는데도 어떻게 집에서 문 열고 막 나온 사람들처럼 생생하지? 정상이라고 사진 찍으며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슬쩍 물었다. “실례지만, 어디로 가시나요?” “향수산이요” 옴마나! 또 귀인을 만났다. 헤맬 때 마다 귀인을 보내주시니 온 우주가 나서서 우릴 돕나보다.
“우리도 향수산 가거든요. 따라갈게요.” 눈치보며 한껏 비굴하게 말하는데 아무 대답도 없다. 프로의 포스를 물씬 풍긴다. 10여명쯤 일행인데 휑하니 돌아서서 줄지어 산을 내려가니 우리도 재빨리 눈치껏 따라나섰다. 그들은 발에 날개가 달렸나보다. 아주 쏜 살같이 날아간다. 일행들끼리 별로 말도 안한다. 그저 발만 재게 놀리니 우리는 숨이 턱에 닿아 쫓아가기 바쁘다. 필시 50대일게다. 아니면 30~40대 인가? 그들 처럼 쌩쌩하지 못해 부러우니 애꿎은 나이탓만 한다.
십여분쯤 내려가니 그제서야 향수산 2.2km 팻말이 보인다. 반가워서 사진을 찍고 쉬려해도 그들의 꼬리를 놓칠까봐 쉴 수가 없다.
향수산 가는 길은 쾌적하다. 석성산 바위들을 타고 다니느라 아팠던 발이 부드러운 흙길만 밟으니 편안한데다 숲이 울창해서 강한 햇빛도 피하고 짙은 나무 냄새가 진동하니 기분도 좋다. 한 시간째 숨차게 열심히 따라가는데 앞서가던 일행 한 분이 뒤돌아서 묻는다.
“왜 이렇게 빨리 오세요? 경치도 즐기고 천천히 오세요. 우리는 문수산까지 가서 포은 묘역으로 내려 갈 거라 바빠서 빨리 가는거예요.”
“정말요? 우리도 그 코스로 갈 계획이에요. 근데 몇 시쯤 도착할까요?”
“오후 3시 도착이에요. 중간에 간단히 점심먹고요.”
쾅! 망치로 맞은 듯, 그 한마디에 우리는 전의를 상실했다. 지금까지 산 두개 넘고 세 시간 걸었는데 앞으로 세 시간이나 더 가야한다고? 향수산 정상까지 1km 쯤 남았는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급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저렇게 날아가도 오후 3시에 도착한다고? 말도 안 돼!
“누가 서너 시간이면 간다고 했어?”
“1시쯤 도착해 점심 먹으러 가면 된다고 도시락 싸지 말라는 사람이 누구였더라?”
“애당초 서너시간이란 말 믿은 게 잘못이지.”
“그러게 철저하게 예습을 했어야지.”
“지금 12시 15분인데 향수산까지만 갔다가 내려가자구.”
“그만큼 올라갔다 다시 여기로 내려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미련이 남아 산 하나라도 더 찍자는 철녀 3의 호소는 단 칼에 거부당했다. 포은묘에서 만나기로 한 '찰리'에게 전화했더니 벌써 와서 대기중이시다. 시간예측을 잘 못해서 포은묘까지 못가겠으니 여기 ‘향린동산’으로 와주십사 했다. 올라갈 때는 못 걷겠다던 철녀 1과 2는 내려가기로 결정하자마자 벌써 후다닥 저만큼 간다. “오늘도 또 실패네.” 툴툴거리는 철녀 3을 철녀 2가 다정하게 위로한다. “그래도 우리 산 정상 두 개나 밟았잖아. 석성산하고 선장산”
오늘도 4시간 반이나 걸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온다. 다음엔 반드시 7시간짜리 산행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밀어붙여야지. ‘이름값 좀 하자구요. 우린 ‘철녀’잖아.’ 라고 소심하게 속으로만 반항해본다. 소리 내서 말했다가는 둘다 ‘우리 철녀 안 할래.’ 라며 도망갈 까봐 무섭다.
돌아와서 꼼꼼하게 따져보니 우리의 야심찬 계획이었던 산 4개, 4시간 주파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모터달린 발이라도 약17km, 최소 6시간거리다. 분하다! 꼭 다시 도전해야겠다. 그런데 어쩐지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외로운 철녀 3만 홀로 가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최성혜
최성혜
1982.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도서관학 학사
1982.2. 한국도서관협회 정사서
1981.12. 대한조선공사
2000-2015년 수능 영어 강사
2018. 11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어담당 근무
2021 용인일보 '책이 내게로 왔다' 오피니언 시리즈 연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