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시절의 추억

 

내가 임관해서 교육을 받고 처음 배치를 받은 부대는 동부전선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x사단 포병연대 xxx 155mm 곡사포 대대 찰리포대였다. 지도를 보면 휴전선이 서부전선에서는 아래로 내려와 있고 동부전선에서는 북쪽으로 쑥 올라가 있는데, 가장 북쪽으로 올라가 있는 부분에 위치한다. 설악산에 버금가게 높은 백암산이 있는 지역으로 민간인통제선 안쪽이라 일반인은 평상시에 들어갈 수 없고 농사를 지을 때만 허가를 받고 출입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높은 산의 산골짜기에 부대가 위치하고 있어서 병사들이 축구를 할 만한 평지도 없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지휘소대 소대장이었던 나는 병사들과 함께 부대 안에서 기거하며 낮에는 교육과 훈련 및 작업을 하였고, 근무가 없는 날 밤에는 혼자 내 숙소에 누워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며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훈련이나 교육을 하면서 병사들과 부대 주위의 산골짜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지천에 도라지, 더덕 등이 눈에 띄었는가 하면 곳곳에 한국전쟁 때의 흔적으로 녹이 빨갛게 슬은 철모나 해진 군화 같은 것들이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유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ROTC 선배 장교 중 한 분이 나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였고, 그 감상을 노랫말로 만든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비목’이라는 가곡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등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이 노래를 들으면 나도 몰래 옛날의 군대시절이 떠오르고 깊은 회상에 빠져들게 된다. 가끔은 무장공비가 넘어오고, 어떤 처녀들이 몰래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북한군에 잡혀 끌려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그곳.

그때 우리 소대에는 SKY대학에 다니다가 온 병사도 있었지만 편일병과 같은 일자무식의 무학력자도 있었다. 편일병은 경상북도 봉화군 산골에서 홀어머니와 화전농을 하다가 징집되어 입대했는데, 요즘 같으면 군대에 가려고 해도 못 갈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한 병사였다. 더구나 홀어머니에 외아들이었는데 호적이 잘못되어 징집되었다고 한다. 교육·훈련을 비롯해서 모든 부문에서 그는 뒤처졌으며,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참으로 착하고도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호해주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고, 지금도 그가 많이 보고 싶다.

언젠가 상급부대에서 검열을 나온 적이 있었다. 부대원들을 모두 집합시키고 인원점검을 해보니 편일병이 없었다. 당혹스러웠으나 얼렁뚱땅 넘기고 전 인원을 풀어 그를 찾으려는데 울면서 그가 나타났다. 검열관에게 지적을 받아 우리 부대가 곤란해 질까봐 부대 뒷산 무덤 뒤에 숨어 있었다는 그를 크게 나무랄 수도 없었다.

문제는 그의 첫 휴가 때 터졌다. 집엘 제대로 찾아 갈 수도 없을 것 같아서 목줄에 코팅을 한 큰 명찰을 하나 걸어주고 거기에 가고 오는 여정을 써서 춘천에 볼일을 보러 가는 선임하사와 함께 보냈다. 과연 그가 길을 잘 찾아가고 또 올까, 혹은 혼자 사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눌러앉아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휴가 마지막 날에 귀대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다음 날 아침 내가 직접 그의 집이 있는 곳으로 찾아 나섰다. 화천-춘천-서울-대구-봉화를 거치니 이미 저녁이 되었다. 막차도 끊겨서 택시를 잡아타고 산골마을의 작은 지서에 가서 물어 손전등을 들고 한참을 헤맨 끝에 골짜기 넘어넘어서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 꺼진 오두막 앞 댓돌에는 여자고무신 한 켤레만 댕그러니 놓여 있었고, 눈을 부비며 나온 노파는 아들이 귀대한다고 이틀 전에 떠났노라고 했다. 지서 숙직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녘에 또 한 번 혹시나 하고 골짜기를 넘어 오두막집 방문을 열어 보았지만 편일병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겁지겁 부대로 돌아오면서도 제발 그동안에라도 와 있길 바랬지만 부질없는 바램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편일병도 걱정이지만 부대원 중에 미귀자가 있다는 것, 그것도 제때에 보고하지 않았다는데 대한 무거운 문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포대장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부대 정문 초소에서 전화가 왔다. 편일병이 왔다고. 아, 하나님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웠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편일병을 불러 물으니 화천에서 버스를 내려 민통선 지역을 걸어오는데 한참 벼를 베던 농민들이 새참을 먹다가 “군인 아저씨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하고 가”라고 부르더란다. 술 한잔하고 음식도 얻어먹고는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일을 도와주다 보니 저녁때가 되었고, 그들을 따라가 농가에서 저녁밥을 먹고는 피곤해서 그냥 자고, 그 다음날 하루 더 일을 해주고 왔다는 것이다. 참 못 말릴 놈이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홍 영 (李 洪 永)
이 홍 영 (李 洪 永)

1948. 3. 2 출생
1963. 3 - 1966. 2    대전고등학교
1978. 3 - 1980. 8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학 (석사)
1986. 3 - 1988. 2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리학전공 (박사과정)
1979. 3 - 1999. 7    국토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
1988. 3 - 1994. 2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강사
2006. 3 - 2011. 9    충청교육신문사 사장
2004. 1 - 2022. 현   경기도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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