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의 역사적 의미
우리가 사는 용인시의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가면 경기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처인성이 있다. 보통 성이라고 하면 단단한 돌로 쌓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처인성은 돌이 아니라 흙으로 쌓은 성으로 현재 높이 약 5~6m의 흙더미가 250m쯤 남아 있다. 처음 처인성을 방문했을 때 저런 흙더미에서 어떻게 당시 세계 최강의 몽골군과 싸워서 이겼을까 믿어지지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의 2차 침입 시 몽골군은 기병을 주축으로 한 10만 명이 넘는 정규군이었고, 처인성에서 항전하던 고려군은 정규군이 아닌 승병과 민병으로 전쟁을 피해 온 피난민 등이 자발적으로 모인 의병이었으며, 그 수도 몇천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무기라고는 농사일에 쓰던 곡괭이나 삽, 낫, 도끼 그리고 약간의 칼이나 활이 전부였을 것이다.
당시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이라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였던 영웅이 나타나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유럽까지도 정복하여 그때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가 거느린 몽골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과 엄한 군기로 유명했다. 몽골의 초원에서 자라난 빠른 말을 탄 기병이 주축이 되어 한 병사가 몇 마리의 말을 끌고 전쟁에 임하였으며, 말의 등에 양고기나 말고기를 말린 육포와 같은 간편한 식량을 싣고 말의 젖을 식량과 식수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보급선이 닿지 않아도 계속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빠른 진격이 가능했다. 추울 때는 말들 사이에 누워서 말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며 잠을 잤고, 식량이 바닥나면 말을 잡아먹었다.
몽골은 전쟁에서 적군이 항복하면 포용했지만 저항하면 참혹하게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몽골군의 군기는 매우 엄했지만 노략질과 강간을 허용했다. 자기가 뺏은 물건은 자기 소유가 돼서 병력을 따라다니는 배달부를 통해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는데다 점령지의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기에 병사들은 그것들을 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다고 한다.
고려는 무려 9차례에 걸쳐서 몽골군에 의해 침략당했다. 이때 침략한 몽골군도 매우 잔혹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좋은 물건들을 빼앗아 갔으며, 남자는 어린아이를 빼고는 보이는대로 목을 베었고, 여자는 잡아다가 노예로 부려먹거나 첩으로 들여 성놀이개로 삼았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에 몽골군의 1차 침입이 있었는데 이는 몽골 사신 저여고가 고려사람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구실로 쳐들어왔으며 개성에까지 와서는 고려와 화해를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수전에 약한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싸울 뜻을 보이자 이듬해 다시 침입하였으니 이것이 몽골군의 2차 침입이다.
2차 침입 시 총사령관이 살리타이였는데 그는 궁술에 능하여 칭기즈칸의 신임을 얻고 장수가 된 사람이다. 살리타이의 군대가 용인에 도착해서 저항에 부딪히자 살리타이는 참모들을 이끌고 처인성을 살피러 왔다. 궁술에 능했던 그는 고려군의 화살사정거리 밖이라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와서 처인성을 살피고 있었는바 이때 승장 김윤후가 쏜 화살이 정확히 살리타이의 왼쪽 눈을 꿰뚫어서 그는 말에서 떨어지고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오늘날 처인성 북쪽 들판의 지명이 사장(死將)터 또는 살장터나 장사터로 불리우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했던 우리 조상들이 만든 활은 중국이나 몽골 또는 유럽의 활보다 우수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활의 사정거리보다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지리멸렬해서 전투의 의욕을 잃고 몽골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4천여 년의 역사에 1천여 회의 수많은 외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 번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 국지전에서 승리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전면전에서 승리한 것을 꼽으라면 딱 두 번뿐이었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해전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교과서를 비롯해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섬나라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김윤후의 처인성전투는 대륙의 대국을 상대로 해서 승리한 것이었다. 그것도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을 상대로 말이다.
처인성전투의 승리는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으로 바꾼 위대한 승리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야만 하는 찬란하게 빛나는 승리였다. 그러므로 자라나는 학생들을 비롯해서 보다 많은 국민들이 이를 알아야 하고, 이에 대해서 더 많은 자긍심을 가져야 하며, 또한 세계만방에 더 널리 알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지역사회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꼭 해야 할 일이다.
1948. 3. 2 출생
1963. 3 - 1966. 2 대전고등학교
1978. 3 - 1980. 8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학 (석사)
1986. 3 - 1988. 2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리학전공 (박사과정)
1979. 3 - 1999. 7 국토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
1988. 3 - 1994. 2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강사
2006. 3 - 2011. 9 충청교육신문사 사장
2004. 1 - 2020. 현 경기도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