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된 윤동주(尹東柱)의 유고시집. 72면 B6판
1917년 만주 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도 이 때 명동촌으로 이사하였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 마을이다. 그는 명동촌에서 20여리 떨어진 중국인 마을에 있는 소학교에 편입해 1년쯤 다닌 추억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함께 시 <별 헤는 밤>을 낳는다.
1935년 9월 평양의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나갔다.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 총독부 당국이 숭실학교를 폐쇄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를 졸업한 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고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 즉,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 거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무서운 시간>, 1941. 2)라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나라 잃어 <간판 없는 거리>의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 불을 켜놓고” 어진 사람 사람들의 손목을 잡고 보듬는 따뜻한 민족 사랑을 시로 녹여 나갔다.
1942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자필 시고집 세 부를 만든다. 그는 세 부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한 부는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나머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준다. 이 시고를 받아 읽은 이양하는 출판을 보류하길 권한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등 몇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에도 위험이 따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윤동주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다. 윤동주와 이양하가 갖고 있던 시고는 행방을 알 길이 없고, 정병욱에게 준 시고만 그의 어머니가 장롱 속 깊이 감춰둔 덕분에 해방 뒤인 1948년 1월 30일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왔다.
* 용인일보는 한국문학 초간본, 잡지 초간본 및 문학 희귀본 1,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1948년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갈색 벽지로 표지를 한 초간본 10권이 제작되었고, 정음사에서 발행한 것은 그 다음 달 1,000부를 찍어낸 초판본이다.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초판 서문에 그가 늘 동경하던 시인 정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라고 썼다. 그의 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깨달음의 정수를, 아름다운 언어로 곱고도 수줍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그의 시는 매우 서정적인 것은 물론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윤동주의 뿌리깊은 고향상실 의식과, 어둠으로 나타난 죽음에의 강박관념 및 이 모두를 총괄하는 실존적인 결단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어둠의 색채로 물들어 있고, 밤의 이미지로 가득차 있을 정도로 절망과 공포, 그리고 비탄 등 부정적 현실이 팽배하고 있어 그의 현실인식이 비극적 세계관에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불변에 대한 이상과 염원으로 일제 암흑기를 이겨나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에는 「자화상」·「소년」·「눈 오는 지도(地圖)」·「또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 18편, 제2부 ‘흰그림자’에는 「흰그림자」·「사랑스런 추억」·「쉽게 쓰여진 시」 등 5편, 제3부 ‘밤’에는 「밤」·「유언」·「참회록」 등 7편이 각각 실려 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는 '서시'만큼 그의 시집의 정신을 대표하고 있다. 그가 가야 할 길이란 식민지인으로 일제의 질곡(桎梏)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의지와 신념으로 민족에 향한 광명을 선사하는 일이며, 고결한 지성으로 불굴의 절조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 종교적인 자세로 하늘아래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다. 「부끄럼이 없기를……괴로워했다」는 것은 희구에 대한 강한 이미지로 부각되어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그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피지배 현실속에서 그는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져 괴로워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거울’은 사회와 역사라는 큰 틀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성찰의 상징물이다.
모두 5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1연에서는 퇴색한 역사의 유물인 ‘녹이 낀 구리 거울’에 욕된 자아인 ‘내 얼굴’을 투영시키면서 부끄러운 자아 또는 망국민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2연에서는 24년 1개월 동안 살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참회를 보여주고, 3연에서는 미래의 즐거운 날(광복 이후)에 지난날 왜 그런 욕된 고백을 했는지 스스로를 질책하는 모습으로 식민지 현실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이어 4연에서는 2연과 3연의 욕된 자아를 몰아내기 위한 끊임없는 자아 성찰과 뼈아픈 노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 5연에서는 암담한 시대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시인 자신의 슬픈 현실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어둠 속에서도 책임감을 가지고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인의 시대적 양심을 보여준다.
즉, 반성과 성찰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지만 그것이 절망도 희망도 쉽사리 약속하지 않음을 예상하고 있으며, 이런 비(非)낙관적인 예상에도 불구하고 ‘거울’ 닦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윤동주 시의 화자야말로 진정한 윤리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病院)」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練),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산문시(散文詩)로 인용문은 제2연이다. 암흑의 사회에서 고민하고 있는 정신적인 병세를 표현하고 있다. 분명히 시대의 아픔을 않고 있음에도, 병원이라는 사회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더구나 성내고 싸울 수도 없고 인내만이 요구된다. 그의 자필시집에는 《병원(病院)》이라는 또 다른 시집 제목이 쓰여졌던 흔적이 있다.
「십자가(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행복(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홀리겠습니다」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구원의 세계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와는 또 다른 상징적 세계처럼 보인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졌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행복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더욱 구체화한 그리스도적 희생정신으로 민족 앞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자신의 결의를 고도의 시적 표현으로 약속하고 있다. 이미 꽃같은 청춘을 제물로 바칠 것을 결단했음에도 괴로움을 안고 있는 회의(懷疑), 그럼으로써 목적하고 있는 세계가 높은 상징성을 띠고 있다.
「또 다른 고향」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房)은 우주(宇宙)로 통(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가자 가자/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여기에서 새로운 세계 「또 다른 고향」을 가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자기와 또 다른 자기인 백골과의 투쟁을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암흑에 휩싸인 우주, 그 안에서 현실에 적응하며 무기력해지는 자신에 대한 반발이다. 일제에게 쫓기듯이 가지만, 백골이 아닌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세계로 지향하는 시인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 용인일보는 한국근대문학 초간본과 잡지 초간본 및 문학잡지 창간호 1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단국대 경영학 석사
필리핀국제문화대학명예철학박사
한국고승유묵연구소장
중광미술연구소장
용인한국근대문학관 건립 위원장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