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오태영 할아버지가 매와 사랑에 빠진 것은, 어릴 때부터였다. 구봉산을 끼고 있는 목신리 마을에는 매사냥꾼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다. 열아홉부터는 매를 조련하고, 데리고 다니며 다양한 스킬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매사냥을 시작했다.
매사냥이란?
매사냥은 맹금을 잡아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는 것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수렵 술 가운데 하나이다. ‘매사냥’은 매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매를 비롯한 맹금류(猛禽類)를 이용해 꿩이나 산토끼 등의 짐승을 잡는 것이다. 매사냥을 위해서는 매를 야생에서 포획해야 하고, 포획한 매를 사냥에 이용할 수 있도록 길들여야 한다.
매를 잡는 데는 비둘기를 미끼로 매를 유인한 후 그물로 덮쳐 잡는 방법, 매의 둥지에서 새끼 매를 잡아 양육하는 방법, 매가 밤에 둥지에서 잘 때 올가미로 잡는 방법, 매가 전에 잡아먹다가 남긴 먹이를 미끼로 해 덥치(싸리나무로 만든 큰 광주리)로 잡는 방법이 있다.
매를 잡은 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조련한다. 우선 잡아 온 매를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데리고 다닌다. 그러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매가 완전히 길들기 전에 두 발목을 가죽으로 만든 끈을 붙들어 매고, 얇은 소의 갈비뼈 조각을 다듬어 소유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은 패각(시치미)를 밀납으로 봉한 후 흰 닭의 깃털(빼깃)로 치장한다. 매의 꼬리에 방울을 매다는 이유는 매가 꿩을 잡은 후 땅에 내려앉아 꿩을 잡아먹으려 할 때, 방울 소리를 통해 매의 위치를 얼른 찾기 위함이다.
매가 사냥 나가기 전날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굶기다시피 하고, 먹이를 주더라도 극히 제한해서 바짝 마르게 한다. 그리고 사냥 전날에는 목화 솜뭉치(솜밥)에 피를 묻혀서 매에게 먹이고 이것을 토해내는 과정을 거친 다음 뱃속이 빈 것이 확인되면 방매꾼 곧 몰이꾼을 데리고 매사냥에 나선다. 매부리가 매를 받고 시야가 좋은 산봉우리 높은 곳에 오르면 2~3명의 몰이꾼이 산 중턱에서 꿩을 날리면서 “나간다”“매 부리여”하고 외친다. 이때 매는 매부리의 손을 떠나 하늘 높이 솟아올라 꿩의 뒤를 쫓아가 잽싸게 발톱으로 쳐서 꿩을 잡는다. 매사냥을 떠날 때는 3가지 금기 사항이 있다. 비가 올 때는 사냥하지 않는 우불(雨不),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사냥하지 않는 모불(暮不), 바람이 불 때 사냥하지 않는 풍불(風不)이다. 매사냥은 음력 10월부터 한식 무렵까지 한다. 이후에는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의 종류와 길들이기
우리가 민요에서 들어왔던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가 매의 종류이다. 보라매는 부화한 지 1년이 안 된 새끼 매이고, 송골매는 사냥용 매를 말한다. 산진이는 1년 이상 야생에서 자란 매를 말한다. 1년이 길들여진 보라매를 수진이라 한다. 보라매와 산진이는 털의 무늬를 보고 구분한다. 보라매는 죽엽처럼 털 무늬가 아래로 향하고 산진이는 가로무늬이다. 매의 먹이로 제일 좋은 것이 날 쥐를 먹인다. 쥐는 고기가 연하고 기름기가 없어 소화가 잘되고 영양이 적어서 기운을 조절하는데 수월하다.
기운 조절이라는 것은 체중 조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람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체중을 빼어 기운 조절을 한다. 배가 고프면 사람을 따르고, 배가 부르면 산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매사냥 도구
매를 훈련하고 관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매를 고정하고 제어하기 위해 매의 발목에 매는 끈을 젖갓끈이라고 한다. 보통 명주실을 꼬아 사용했다. 그리고 도래는 젖갓끈과 장승줄 사이를 연결하여 매가 회전하여도 줄이 꼬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이외에도 여러 도구가 필요하다. 매를 실내에서 앉혀 놓는 기구 통아리(횃대)가 있다. 또한 패각(시치미), 방울, 망우(빼깃) 등으로 구성되고, 매 장갑(버렁), 매보자기(매 쌈보), 먹이통, 야외에서 매를 훈련할 때 필요한 날림줄, 소리에 놀라 날뛰어 다치거나 깃털이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눈가리개 등이 필요하다.
역사 속 매사냥
인류의 매사냥 역사는 4,000년 이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는 선사 시대부터 생계 수단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여가 활동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아갔다. 고려 충렬왕 시대에는 매의 사냥과 사육을 전담하는 관청인 응방(鷹坊)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명매(名鷹) 해동청(海東靑)의 공헌으로 명나라와의 곤란한 교섭이 해결된 바도 있다. 숙종 41년(1715) 때까지 명맥이 존속 되었다.
조선시대 매를 길들여 지휘하는 전문 사냥꾼을 응사(鷹師), 민간에서는 ‘매부리 혹은 매꾼, 봉받이(꾼)’라 하였다. ‘수할치’라고도 하는데, 13세기 이후 몽골로부터 유입된 명칭이다. 숙종 때의 문인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은 매사냥을 시로 남길 정도로 좋아했다.
자 남은 보라매를 엊그제 갓 손떼어
빼깃에 방울 달아 석양(夕陽)에 받고 나니
장부(丈夫)의 평생득의(平生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매사냥하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매사냥은 우리 선조들의 생활문화뿐만 아니라 현대문화 속 어휘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눈보라에서 사용된 접미사 ‘보라’는 보라매가 긴장을 풀고 앞가슴 털을 활짝 터는 모습과 사냥에서 먹이를 낚아챌 때 흩날리는 앞가슴 털에 대한 형상화이고, ‘옹골지다’는 응골(鷹鶻)에서 기원을 둔 어휘로 매가 야무지게 사냥하는 것에 대한 비유이며, 속담 중 ‘시치미 떼다’라는 뜻은 자기가 하고도 안 한 척하거나, 알고도 모르는 체할 경우에 쓰인다. 여기에서 시치미란 매사냥에 쓰이는 매의 이름표를 말하는데, 주인의 이름을 써서 매의 꽁지에 달았던 시치미를 떼고, 매의 주인이 나타나도 모르는 체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신혼 첫날밤 에피소드
초록 치마 다홍 저고리를 입고 앉아 수줍게 신랑을 기다리는데, 자정이 되어도 신랑(오태영)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만가지 근심으로 밤을 지새운 새색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알고 보니 혼례를 치른 후, 신랑이 매방에 갔던 것이었다. 당시 스승이었던 故 김봉수 수할치가 이 사실을 알고, 신방으로 쫓아 보냈고, 새벽 1시가 넘어서 신혼 방으로 돌아와서 첫날밤을 치렀다. 매사냥꾼인지 모르고 시집온 할머니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긴 세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로하고 계신다.
매사냥꾼들에게 '삼 뜯기'가 있다. 첫째는 매가 꿩을 뜯는 것이요, 둘째는 남편이 나무를 해 오지 않아서 부인이 울타리를 뜯는다는 것이요, 셋째는 매사냥을 나간 남자가 수풀을 헤치며 다니다가 가시나무에 바지를 뜯긴다는 것이다. 매사냥의 중독성을 풍자한 말인데, 사냥에 미치면 다른 일은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용인의 마지막 매사냥 꾼 오태영 수할치는 구봉산을 바라보며 “겨울철 이맘때가 사냥하기 좋은 때야”라며 사냥 의욕이 강한 매는 손에 받고 있을 때 날고 싶어서 그 반응이 발톱을 통해 전해진다고 한다. 재미가 그지없는 매사냥하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매사냥은 수렵문화 중에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몇 안 되는 무형유산이다. 폭넓은 자연과 우주적 지식을 갖추고 전승시키고 있는 역사 깊은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매사냥이 지닌 무형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한층 폭넓게 열리길 기대한다.
[출 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희주,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이론적 고찰 및 패러다임의 변화: 눈에 보이지 않아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형문화유산의가치」, 『무형유산』 제2호(국립무형유산원, 2017).
-나경수, 「무형문화재와 민속학의 거리」, 『무형유산』 제8호(국립무형유산원, 2020)
다.
-『매사냥 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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