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외수 사진
△ 이외수 사진

밤바다처럼 출렁리는 장발을 휘날리며 도시의 뒷골목을 어정거리던 시절, 이외수 선생님을 만나러 춘천 명동다방을 어른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피 끊는 청춘을 더욱더 흥분되게 하고 혼돈의 현실 상황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독재자 앞에 돌을 던지지 않으며 강의실을 지키던 학생은 학구열을 상실한 의식 없는 청춘이 되고, 길거리로 나서지 않는 교수는 교육열이 없는 지식인으로 도매금에넘어가던 시기였다.

피 끊는 젊음은 불의에 항거하며 피난처와 돌출구를 찾았고, 방황의 자유와 타락의 자유, 도전의 자유를 외치던 호기는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했다.

이때 몇 년간 머리도 자르지 않고 몇 달간 목욕도 한번 하지 않은 거지성자 방외지사 이외수의 출연은 젊은이들을 환호케 했고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꿈꾸는 식물, 들개, 칼, 벽오금 학도는 빙어처럼 맑은 특유의 문체로 독자를 사로 잡았고, 거지성자의 신비로움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 그를 둔갑시켰다. 

춘천의 격외선당은 신비로운 교주를 친견하기 위해 전국에서 문학청년들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도 이에 합류해 격외선당 성지는 젊은이들이 모여 문학과 정의가 용광로처럼 불 태우는 장소가 되었다.

△ 2001년 춘천 격외선당 방문 시 이외수 선생님의 부인 전영자 선생님이 직접 찍어준 필자의 가족사진. 
△ 2001년 춘천 격외선당 방문 시 이외수 선생님의 부인 전영자 선생님이 직접 찍어준 필자의 가족사진.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 잡담을 들은 수강료로 어느 해인가에는 수라간 풍년김치 대표에게 부탁해 갓김치 30키로, 파김치 30키로, 배추김치 80키로, 총각김치 50킬로를 보낸 적이 있다.

격외선당 1층은 작은 서점이고 2층은 이외수 선생님의 그림 갤러리이고 안채에 살림집이 있는데 문학과 수다 강의는 주로 안채에서 있었다.

어느 여름날,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6학년 딸을 데리고 격외선당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놈들은 아빠의 추억과 감상은 아랑곳 없는 듯 맥없이 축처저 왜 이런 곳을 왔냐며 인상 쓰면서 억지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 은평한옥마을 '셋이서 문학관' 
△ 은평한옥마을 '셋이서 문학관' 

이런저런 사유로 이외수 선생의 문학관은 화천으로 옮겨 건립되고, 옥호도 격외선당에서 감성마을로 바뀌어 춘천의 인연과 추억 또한 사라져갔다.

군대 벙커를 연상시키는 문학관은 화천의 감성마을이라 이름하여 전국에서 문학도와 명사들이 밀려들었는데 이 산골 문학관에 이념이 물들면서 정치가 개입되고 고을원님의 당적이 교체되면서 문학은 퇴색 되고 감성도 잃어갔다.

시간이 흘러 필자는 서울시 은평구 한옥마을에 20세기 한국의 기인(奇人) 중광·천상병·이외수 세 분의 "도적놈 셋이서 문학관" 건립에 참여해 중광스님 작품과 도서 등 관련자료를 7년째 임대방식으로 대여하고 있다.

참으로 오래된 젊은 날의 정신적 스승과 인연의 끈은 선생님이 가시고도  계속 이어져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르쳐주시고 계신다.

젊은날 피끊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선생님은 가시고 나 또한 늙어 고목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난 그때를 잊지 못하고 청년의 마음으로 이글을 쓴다.

분명 거지성자와의 이생에서의 인연은 전생의 인연이 연결되어 다음생까지 이어질 것 같다.

이외수 선생님이 필자에게 그려준 달마도
△이외수 선생님이 필자에게 그려준 달마도

 


 조대안
 조대안

단국대 경영학 석사
필리핀국제문화대학명예철학박사
한국고승유묵연구소장
중광미술연구소장
용인한국근대문학관 건립 위원장

저작권자 © 용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