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미학의 사찰, 천 년 역사 서봉사지
서봉사(瑞峰寺)는 10세기 후반 고려 왕실의 왕권 강화를 위해 화엄종 소속으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서봉사에는 석탑과 불상이 조성되었는데, 이들은 용인지역 석탑과 석불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185년에는 무신정변과 왕자로서 출가하였던 ‘충희’의 비행으로 위기에 처했다. 왕실과 화엄 종단은 반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당시 존경받던 현오국사의 탑비를 화엄종 사찰이었던 서봉사에 건립한다. 그러나 몽골 침입 때 서봉사는 망폐되고, 개경 환도 이후 권문세가에 의해 절이 중창되면서 화엄종에서 천태종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유교를 전면에 내세운 조선 태종 때 자복사(資福寺 왕실의 평안과 발복(發福)을 기원)로 지정, 서봉사의 법등은 꺼지지 않았다.
‘서봉사(瑞峯寺)' 명문 기와를 통해 서봉사지 기와 제작과 유통이 주목되었다. ‘成化三年’ 명 문 내용은 成化 3년인 丁亥(정해) 1467년(세조13)에 기와를 제작하였고, ‘가정 32년(嘉靖三十二年)’ 1553년 명종 8년 계축(癸丑) 명문 기와에서 알 수 있듯이 유적의 운영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15~16세기까지도 가람은 중수되었으며, 전란 이후에도 없어진 비부(祕府)를 다시 만들고 탑비를 이건 하였지만, 결국 법등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서봉사(瑞峰寺)는 보물 제9호로 지정된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1185년)가 있으며, 조선 태종 때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거점 사원이었다. 이러한 서봉사지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3개 구역으로 나눠 (재)한백문화재연구원이 8만1000㎡을 발굴 조사 했고, 출토된 명문 기와 종류만 14종에 달하는 등 경기 남부지역 최대 규모의 사찰 유적지로 밝혀진 바 있다.
막새기와 장식을 거리낌 없이 연꽃 형상으로 만들어 처마 선에 올린 백자 연봉은 전국 사찰 4곳(충주 숭선사지, 양산 통도사 대웅전,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서산 개심사 대웅보전)에서만 발견될 정도로 희소성을 띤다.
연봉(蓮峯)은 지붕 위 기왓골 끝에 설치하는 기와 장식이다. 방초정(防草釘)의 광두(廣頭, 큰 못머리)가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덮어씌운 것을 말한다. 방초막이는 방초(막새)가 흐르지 않도록 하는 큰 못을 방초정(防草釘), 와정(瓦釘), 중국에서는 모정帽釘)이라 부른다. 지붕 끝의 수막새 기와나 서까래기와 등을 나무 부재에 고정하기 위해 박는 큰 쇠못이다. 못을 박지 않으면 기와가 미끄러져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못을 박고 나면 기와 등에는 쇠못 끝부분이 남아 볼록하게 보이는데, 미관상 좋지 않으므로 연꽃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덮었다. 이것을 '연봉' 또는 '백자 연봉'이라고 부르는데, 고려 때에는 청자로, 조선조에는 백자나 토기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목조 건물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기와에 스며들어 목조 건물이 썩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 빗물이 기와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 빨리 흘러 내려가게 하여 목조 건물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기와지붕의 곡선에 숨겨진 과학 원리가 바로 ‘사이클로이드 곡선’이다. 경사면이 급해 일반 직선 경사면보다 물체의 강하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되는데, 빗물이 기와에 고여 스며들지 않고 빨리 바닥으로 흘러내리게 만들어 지붕의 나무 부분이 썩는 것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원리다. 미학을 더 보탠 연봉은 ‘방수’와 ‘미관’과 지붕의 ‘안전’을 확보한 우아한 조형물이자 고품격 건축 기술이다.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연봉(蓮峯)은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을 연꽃으로 장식한다는 종교의 상징적 의미를 담아 표현했다.
우리의 미의식은 개인의 주관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집단으로 공유하는 정서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역사와 문화, 종교가 서로 연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격(位格)이 높은 사찰이었던 서봉사지(瑞峯寺址)는 한국적 아름다움까지 놓치지 않는 미의식이 깊게 녹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