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순절 충신 민영환(閔泳煥)은 1861년 8월 7일 서울 전동에서 당시 권문세가였던 여흥 민씨 가문인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아버지 민태호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큰집으로 입적이 되었다. 민겸호는 흥선대원군의 막내처남이니 민영환과 고종황제와는 내외종 간이다.
민영환은 1877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1878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 20세에 정3품 당상관으로 고속 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1882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발탁되었다. 이렇게 빠른 승진의 이면에는 척족(戚族)의 뒷받침과 외사촌인 고종의 적지 않은 총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친아버지인 민겸호가 임오군란 시 피살되는 상황에도 1884년 이조참의, 1887년 예조판서,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판서, 서른둘인 1893년에는 형조판서와 한성부윤을 지낸다.
그 후 격동의 구한말 상황이 숨 가쁘게 전개되어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개혁이 있었고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기간인 10월에는 순유사(巡諭使)에, 1895년 8월 에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된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고, 1896년 2월 11일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급거 도피하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미·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그해 4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한다.
1897년 구미 6개국 특명전권공사직을 맡게 되는데 다양한 외교활동과 앞서가는 영국, 러시아 등을 방문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관료로서 크나큰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 그는 구미(歐美)에서 돌아온 후 천하대세를 연구하여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 것을 통탄히 여기고 고종 앞에만 가면 눈물을 흘리며 극간(極諫)하고, 물러나면 단정히 앉아 깊은 상념에 쌓여 있었으며 세리(勢利)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특이하게 여겨 전일의 민영환(주: 그 전에는 외척의 기세를 업고 무척 건방졌었다고 한다.)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이때 과연 큰 절개를 세워 늠름한 옛날 열사(烈士)들의 기풍이 있었다.(매천야록) -
운명의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 당시 민영환의 직책은 임금의 옷이나 물건 등을 관리하는 한직인 대한제국 시종부무관장(侍從府武長官) 육군부장(陸軍副將, 정1품) 이었다. 나라를 돌보지 않는 친일적인 대신들과의 대립과 일본의 내정간섭을 반대하다가 밀려난 것이다. 늑약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1월 18일, 유명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황성신문 논설은 11월 20일에 실린 것이다.
민영환은 전 부인인 정경부인 안동 김씨의 산소 이장 문제로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水枝面)에 내려가 있다가 늑약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하였다. 11월 27일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가 주동이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매국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민영환도 물론 참여하였다. 다음날 재차 상소를 올렸다. 오히려 일제는 일본 헌병을 출동시켜 백관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조병세와 함께 민영환을 붙잡아 갔다.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피눈물을 흘리며 아무리 상소를 한들 이미 기울어진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하였다.
고종은 이들의 상소를 대하고 “이미 여러 차례 밝혔는데 왜 자꾸 이리 번거롭게 구느냐.”며 “물러나라.”고 하였다. 이미 일제의 압력에 관리의 임명조차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처지에 을사늑약 무효화를 선언하고 자의적으로 체결에 동의한 대신들을 처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나라와 민족이 자유 독립을 회복하는데 초석이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머니를 뵙고 볼에 얼굴을 비비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임신한 아내 곁에는 세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이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내가 점을 치니 아들이 다섯이라 했는데 아기를 가졌구려.” 하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차마 죽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였다.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경, 서울 회나무골(檜木洞)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이었다. 45세의 창창한 나이였다. 사랑하는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 대한제국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스스로 목을 찔러 순국하였다.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을 기어이 도우리니.....” 하며 국민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구한말 우국지사 최초의 순절인 민영환의 죽음을 접한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전 이조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병사 김봉학 등도 연이어 자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의 상소 투쟁이 이어졌다. 상인들의 철시 투쟁이 있었고, 각급 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업을 통해 시국을 성토하였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종로 네거리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민영환이 죽은 오늘이 바로 전 국민이 죽은 날이다.” 하였고 고종도 그의 상여가 대한문에 이르렀을 때 곡을 하며 배웅하였다. 애국 애민의 정성을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민영환에게 고종은 엄중히 장례를 지원토록 하고 영의정격인 의정대신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내려주었다.
"이 중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바르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다.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받던 사람인데, 이 어려운 때에 괴로운 심정이 절절하여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강개하고 격렬해져 마침내 자결하였으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은 해와 별을 꿰뚫을 만하다. 짐의 마음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조선왕조실록)“
민영환의 순국 후 피 묻은 옷을 보관하고 있던 방의 마룻바닥에서 붉은 반점이 배인 대나무가 솟아올랐다. 정확히 1906년 2월에 뿌리도 없이 자라 9월에 시들었다. 그의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45개의 잎이 달려있었다.
자칭 의를 좇는 선비라고 하는 이들이 불의를 보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분연히 일어나 항거하거나, 초야로 스며들어 은둔하거나 권력에 타협하고 아부하며 살아가거나이다.
서릿발 같은 의로움을 죽음으로 실천한 순국 충절의 의인 민영환의 유해는 용인군 수지면 토월마을에 봉분 없이 평장되었다가, 1942년 지금의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이장되었다. 부인과 합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 귀한 뜻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