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처사이며 실학자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광해군 14년에 태어나 현종 14년까지 살았던 조선 후기 실학파의 상징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이다, 외가는 여주이씨 문중이며 1653년 제주 해안에 표류한 하멜 일행(하멜표류기 저자)을 잘 대해준 제주 목사 이원진이 바로 외삼촌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성호 이익(李瀷)과는 6촌 관계로 나이로는 유형원이 증조할아버지뻘이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예문관 검열(정9품)이었던 아버지는 인조반정 이후 옥사에 연좌되어 누명을 쓰고 스물여덟의 나이로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그 뒤 외숙인 이원진과 고모부인 김세렴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을 읽다가 감탄했다고 한다. 과거는 전혀 생각이 없었다. 스물아홉부터 여러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낙제한다. 시험을 본 것도 본인의 뜻이 아니라 위독한 조부의 유언이었으니 절실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과거제의 폐단만 절감하고 과거 급제를 단념하였다. 대신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조선시대 200년 이상 누적된 여러 가지 사회모순이 극대화되던 시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전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졌다. 당연히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획기적인 혁신과 변동의 요구가 일어났다. 겪어보지 못했던 변란을 통해 그동안 무시했던 모순들을 냉철히 분석하고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마련해야 할 부류는 당연히 집권층이나 기득권층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책임 전가의 당쟁이 횡횡하고 사회가 어수선할 때 태어난 그였다. 전 국토를 훑고 지나간 임진왜란의 참상은 글에서 읽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직접 들었거니와 병자호란(1636년)은 그의 나이 14살 때 일어났다. 난을 피해 피난 생활도 해보고 전국을 소요하며 백성들의 참담한 생활을 목도하며 잘못된 것을 고치고 그들의 원하는 바를 글로 남겨야겠다는 각오를 다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사상은 백성을 고르게 바라본다는(均) 이상적 국가개혁론이었다.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보호하자는떼 누가 마다할까 싶지만 현재도 그렇거니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들의 자기 희생없이 자발적인 개혁이라는 것은 아무리 좋은 방안이라 해도 실행이 되지 않는 법이다.
유형원은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최대 업적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있다. 그가 제시한 장대한 국가개혁안의 핵심이다. 전(田), 교선(敎選), 임관(任官, 직관(職官), 녹제(祿) 등 그동안의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를 혁파하고 공전제를 폐지하여 토지를 개혁하고, 관리는 능력에 따라 직무를 부여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축소 통합하며 군현제를 통폐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계(磻溪)는 그의 호이다. 바늘 없는 낚싯줄을 드리우며 성군(주나라 문왕)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던 강태공이 낚시하던 계곡이 반계이다. 수록(隨錄)은 책을 읽다가 생각이 미치는 데에 따라 수시로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26권 13책으로 1652~1670년까지 기록된 것이니 18년간이며 30살 때부터 48세까지 쓴 책이다. 역시 대표적 실학자의 한 명으로 거론되는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이 글이 과연 읽혀지겠는가 하였는데 그 보다 먼저 태어난 유형원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유형원이 17세기 초의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국가운영 원리를 제시하였다면 다산은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현실 상황에서 국가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유형원은 관료 출신이 아니었고 정약용은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일했던 고급관료 출신이었다.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기미가 없고 사상적으로 의지하던 명나라까지 망하자 “돌아가자 한 해도 저물었는데 ” 하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답을 하고 은거한 곳이 전라북도 부안의 우반동이었다. 기록에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출사를 하지 않고 전국을 돌다 정착한 곳이라 한다. 도연명도 약간의 현실 타협을 했다면 관직을 지키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형원 또한 마음만 먹으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나라에서 부르기도 하였다. 도연명처럼 타인은 무슨 짓을 하듯 올곧게 자기의 선을 지키겠다는 절개가 유형원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란 기득권자들이 변해야 가능한 것이니 개혁에 무관심한 그들에게 그의 하소는 한낱 스치고 지나가는 부담없는 충고일 뿐이었으리라.
그가 떠나고 난 뒤 숙종 4년인 1678년 반계수록에 담긴 내용의 실행에 대한 논의가 조정에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이 오활(迂闊)하다며 묵살 되었다. 실제와 거리가 멀고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자의 글이라고 폄하하였다.
그 후 1750년에 이르러 영조는 “3대 이후 제일가는 경국책(經國策)”으로 여기고 정조 시기인1770년에 이르러 간행에 이르니 유형원이 떠나고 97년 만의 일이다. 1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정신을 바로 보는 성군이 나타났기에 빛을 본 것이다.
“이 글은 보지 못했음에도 본 것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알고 있으니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정조실록)
정조는 또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책이며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도 당대에 알려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이 내용은) 어설프고 허황된 말이 아니요, 대부분 실용에 적합한 내용이라 하였다.
세월이 더 지나 1864년 고종에 이르러 반계수록의 강명(講明)을 하겠다는 실록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라에 큰일을 당하게 되면 그릇되고 어긋나서 결국 큰 소리만 칠 뿐 실질은 없다, 그로 인한 재앙은 백성들이 받는다. "
1673년 음력 3월 19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반계 유형원의 무덤은 용인시 처인구 백담면에 있다. 문화 유씨의 선산이다. 평소 부모님을 모신 용인을 100번 이상 다녀갔다고 전해진다. 죽어 부모님 옆에 묻히겠다는 유언에 따랐다. 지금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유형원은 용인의 고운 땅에 누워 21세기의 어떤 성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