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매한 최영희 애창곡집은 당시 주류였던 싸이키델릭에 반발하여 기획한 스탠더드팝송 형식의 음반이다. 수록된 10곡 중 타이틀 곡 「너만을 위하여」 등 4곡은 이봉조 악단이 세션을 맡고 최고 히트곡 「잃어버린 사랑」 등 6곡의 팝송 번안곡은 최영희가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사랑의 창문」은 최영희가 가사까지 썼다. 음반재킷의 이미지는 1969년 3월 발행한 <주간여성> 표지모델 최영희의 사진이다.

최영희 애창곡집, 너만을 위하여 LP 커버 ⓒ조대안

1948년 서울 충무로에서 피아노상회 <음악사>를 경영했던 부친 최성두씨의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최영희. 삼촌은 최고의 레코드 녹음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최성락씨다. 풍성한 음악적 가정환경에서 최영희는 남산초등학교시절 KBS 어린이 합창단과 무용특별활동도하고 전교 어린이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학업성적도 뛰어나 이화여중시절 전국 영어웅변대회에서 2위로 입상했고 이화여고에서는 음악부장을 맡아 합창단 지휘를 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발한 학생이었다. 연세대 작곡과에 입학하면서 68년 동양TV ‘청춘잼버리’출연을 계기로 대중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데뷔곡은 가수 넷킹콜의 ‘모나리자’였다.

최영희는 1969년 휴학하고 이봉조가 작편곡을 해준 독집음반 ‘최영희애창곡집’을 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첫 독집 발표 후 최영희는 순수 음악도에서 대중가수로 변신한 희귀한 케이스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여대생 가수 최영희는 충무로에서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포크송을 부르기 시작해서 영화배우, 탤런트에 방송 DJ등까지 지평을 넓혔다. 세간의 관심을 받는 인기 여가수가 조영남과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데다, 신중현이 음악감독한 <푸른사과>에서 남녀 주인공을 하는 바람에 열애설이 퍼졌다. 이렇듯 장안의 관심을 한 몸에 받자, 어머니와 형제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절대적인 지지로 가수를 계속할 수 있었다.

최영희 애창곡집, 너만을 위하여 LP 커버 ⓒ조대안

이 음반발표 후 최영희는 드라마 <너무 하셨어> <마지막 낙엽>의 여주인공으로 주제가를 부르고 인기방송프로 <원 투 드리 고> <쇼쇼쇼> <백화가요쇼>에 주요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자신의 노래 곡명을 딴 TBC 라디오프로 <너만을 위하여>의 DJ까지 맡으며 내재된 재능을 마음껏 발산하다가, 1970년 신학기에 돌연 모든 활동을 접고 학교에 3학년으로 복학했다. 전공공부와 피아노 실기에 전념하며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같은 소품들을 작곡했다. 그때 가족들은 모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고 혼자 한국에 남아 학업을 마쳤다. 졸업 후에는 일본 상지대 출신 교포 신세환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떠나기 전 73년 6월 마지막으로 KBS TV 드라마 <은하의 계절>에 출연했다.

최영희는 그저 노래만 잘했던 가수가 아니다. 작곡은 물론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등을 직접 연주하며 노래 부른 음악적 재능과 열정으로 기억되는 대중 가수였다. 60년대말 지극히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순수음악을 전공하던 여학생이 자신이 꿈꾸던 대중예술을 위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감행한 변신. 인기절정의 순간에 다 버리고 본연의 학생신분으로 돌아가 버린 그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너만을 위하여 - 최영희 노래 (이봉조 작곡)

꽃잎에 새긴 이름 낙엽에 흩어져도
그언젠가 다짐했던 그말은 못잊어
그토록 애타게 너만을 위하여
너만을 위하여 사랑했어요
이한몸 다하여 너만을 위하여
너만을 위하여 사랑했어요
아아아아 외로이 나혼자 있어도
그언젠가 맹서했던 그말은 못잊어
가슴에 사무친 영원한 그님은
지금은 내곁에 없어도
이 세상 끝까지 이 한 몸 다하여
너만을 위하여 사랑했어요
아아아아 외로이 나 혼자 있어도
영원한 그 사람은 가슴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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