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은 1935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면서기와 농협서기로 일한 아버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살이를 겪으며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에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된다. 1956년 신경림은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금서를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된 충격과, 평소 갖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으로 서울을 떠나 낙향한다. 1960년대초까지, 평창, 영월, 문경, 춘천등지를 떠돌며 광부, 농부, 장사꾼, 인부로 지내며, 무력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동료 시인들에 대한 질투심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친구 김관식의 강권으로 그의 집에 기거하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마침내 「농무」가 탄생한다.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1970년대에 신경림은 거듭된 불운과 궁핍으로 힘든 나날을 보낸다. 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민요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 무렵 시인은 민요의 전통을 차용해 민중의 삶과 언어로 그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시를 지향한다.
1979년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내놓는다. 단형 소품 서정시 32편과 장시 새재가 실려 33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시인의 신념과 민중적 가락이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에 실린 「목계장터」는 민요의 기본 율조인 4음보 가락을 바탕에 깔고 3음보 가락을 적절히 배치한 절창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만들어 혼자 해오던 민요채집을 여럿이 함께 하는 문화운동으로 끌어 올린다. 그가 찾은 민요를 갈무리해 펴낸 『민요기행 1』(1985)은 큰 호응을 받았고 1988년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내, 농민시인에서 노동시인으로 발돋움한다. 『민요기행 2』에 이어 1990년에는 이 땅 구석구석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을 노래한 기행 시집 『길』을 내놓고 제2회 ‘이산문학상’을 받는다. 1995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선집이 <갈리마르>에서 나와 신경림의 문학성이 이제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살림살이에 관심을 갖고 문단의 원로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환경운동연합 대표로 활동하다가 암으로 투병중 2024년 5월 22일 숨을 거뒀다.
발행 창작과 비평사 1974년, 면수 116면, 크기 127*209*7mm
신경림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라져가는 농촌을 탐구하고 그 사회변화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민중을 화자로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사실주의 작품들은 시집 『농무農舞』로 1973년 3백부 한정판으로 자비출판 되어 서점에 깔리자마자 모두 팔려나가면서 신경림은 문단과 독자들에게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다. 시집 『농무農舞』는 1960년대 공업화 우선 정책에 밀려 삶이 해체되는 농민들의 암울한 절망과 울분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그의 시는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는 찬사와 함께 신경림을 단숨에 현실 비판적인 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올리게 된다.
다음해인 1974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다시 출간된 『농무農舞』에는 4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대표적인 시로는 「겨울밤」, 「시골 큰집」, 「파장」, 「농무」, 「눈길」, 「그날」, 「폐광」, 「갈대」 등이 있다. 모두 철저하게 민중적 소재와 가락, 민중의 정서와 언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광산과 산촌, 들판과 논 같은 일터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주변부로 밀려난 광부, 농부, 빈민, 건달, 아편쟁이들이다. 그들이 품고 있는 전쟁의 상처와 절망, 눈앞의 답답한 현실, 스산한 삶, 슬픔과 한, 노여움등을 전달한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모여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 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신경림, 「농무」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상인데, 그럼에도 농사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하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과 “철없이 킬킬 대는” “처녀애들”밖에 없어도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해해대”면서도 풍물로 “신명을” 낸다. 농투성이들의 피폐한 삶의 적나라한 풍경이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시인의 반열에 올라, 제 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다. 나중에 이 시집의 영역판 『Farmer’s Dance』 가 출간되어 미국 코넬대학교의 한국학 강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단국대학교 경영학 석사
필리핀국제문화대학 명예 철학박사
칼빈대학교 명예인문학박사
한국고승유묵연구소장
중광미술연구소장
용인한국근대문학관 건립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