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에도 단계가 있어서 잘 쓴다고 할 때는 달필(達筆)이라 불린다. 달필의 경지를 넘어서는 명필(名筆)이라 한다. 그다음 단계가 영필(靈筆)이다. 자신의 힘과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경지의 글씨, 살아 꿈틀거리는 차원의 글씨를 말한다. 그다음 단계는 필설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감각적인 경지에 이른 글씨로 신필(神筆)이라 한다. 그다음으로 넘어가면 선필(禪筆)이다. 무심필일 뿐 아니라 높은 선수행의 결과가 필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글씨이다. 그 다음은 성인(聖人)과 버금가는 기운과 도의 깨달음을 이르러 감히 흉내 낼 수 없다는 글씨 즉 도필(道筆)이다. 선필이나 도필은 필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필법에 구애를 받지 않는 정신적인 내면의 세계를 살린다. 순진무구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예로부터 무한한 노력과 피나는 수련을 통해 예와 도를 깨우쳐야 서예와 서도를 익히는 법이다.
달마는 말할 것도 없고 시중에 보기 드문 중광(重光)의 글씨는 도필까지는 채 아니더라도 선필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치필(稚筆)이며 치필(痴筆)이다. 속기와 기교가 보이지 않는 동심계(童心界)를 넘나드는 최고의 글씨라는 것이다. 오랫동안의 선수행(禪修行)에서 나온 체(體)이기 때문이다. 탈속의 경지에서 붓끝으로 단숨에 뿜어져 나오는 선(線)은 수천수만 번의 반복에서 오는 달관과 무심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중광은 말한다.
“나는 먹을 갈면서 나의 망상을 먹으로 사정없이 모조리 갈아버렸다. 그리고 까만 먹물 속에서 하얀 달을 가끔씩 건져내었다.”
비인마묵묵마인(非人磨墨墨磨人), 즉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선(禪)이란 만다라의 화두로 청정한 지성을 찾는 수양이다,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감성의 수행 방법이다. 병 속에 들어있는 새를 병을 깨지 않고 어떻게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가이다. 선의 핵심은 생각으로 답을 더듬고 찾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식과 마음)이 멈추고 박살이 나는 것으로 중광은 깨우쳤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겼다. 중광은 한자를 양손으로 쓰고 심지어 마지막 획으로부터 거꾸로도 썼다.
중광은 말한다.
“나는 세속의 굴레에서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며 내 생활과 내 작품 안에서 그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서예는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에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외부와 단절되었고 미술은 근대 서구 미술의 전통을 앞세워 따라가기에 바빴다. 철저히 엉터리 화가라는 비난에 개의치 않고, 속세의 낮고 천한 존재를 자처하며 예술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실천하였다.
산승(山僧)이 달마(達磨)를 즐겨 그리는 것은 무심에 다다르고자 함이다. 즉 세상의 격식과 제도와 틀을 깨는 일, 어떤 관념에 집착하여 현실을 망각하고 물바람에 수면이 따르는 것처럼 마음, 즉 본성이 하라는 대로 선을 내리고 휘젓는 무심선필로 그려진 달마가 진정한 달마도 인 것이다. 중광은 깨고 부순 달마를 그리고 그린 달마를 또 깨고 부셨다. 그래서 중광의 달마는 모두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 달마도는 1636년, 1643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두 번이나 다녀온 도화서 화원 연담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를 으뜸으로 친다. 그러나 300년이 지나 태어난 중광의 힘찬 붓질과 간결함은 오히려 연담의 달마도를 뛰어넘는 듯 보인다. 연담은 직업 화가였고 중광은 무애(無碍)의 승려였다.
중광은 말한다.
“달마를 그리려면 달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달마와 친해져야 한다. 그리고 달마를 죽여라, 살활(殺活)이 자재(自在)해지거든 달마를 그려라. 그러므로 달마는 깨친 자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중광이 남긴 100년도 넘은 먹에서 나오는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중광은 떠났지만 묵향이 아직도 분분한 것으로 보아 지금 옆에 없는 듯, 있는 듯 세상의 오욕을 먹물로 훔치는가 보다.
“학문과 인식의 옷을 입고 나를 보면 나를 보지 못한다, 나는 법도 벗어버리고 시간도 벗어버렸다, 공간도 버렸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본단 말인가.”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