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9월 20일 초판 발행
『근원수필』의 작가로도 잘 알려진 김용준은 문ㆍ사ㆍ철(文史哲)을 겸비한 화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였다. 그동안 월북작가로 금기시되었던 그는 지금 민족주의자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은 1904년 2월 3일 경북 선산(善山)에서 김이도(金以燾)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3년에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서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등과 함께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1924년에는 도화교실에서 이종우(李鍾禹)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같은 해에 학생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동십자각(東十字閣)>(원제 <건설이냐, 파괴냐>)이 입선되어 화제가 되었다. 경복궁의 동십자각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는 공사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어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이 재학하고 있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김용준은 표현파를 추구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치사(百痴社)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을 만나 그때부터 『문장』지 시절에 이르기까지 깊은 교유관계를 지속하였다.
동경미술학교 재학 초기에는 당시 일본 전위 작가들이 수용한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일시적으로 경도되기도 했다. 1927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그의 첫 미술론인 「화단개조(畫壇改造)」, 「무산계급회화론」 등에서 이러한 그의 사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석 달 후에 발표한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은 이전의 글에서 주장하였던 논지를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김용준의 예술론은 임화(林和)와 같은 당대의 프로예맹 이론가들에 의해 ‘시대의 반민족주의적인 순수미술론’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0년에 동경미술학교 동문들과 함께 동미회(東美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고, 향토회(鄕土會)와 백만양화회(白蠻洋畫會)를 조직하는 등 한국 근대화단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1년 2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김용준의 화단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는 귀국하여 중앙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제2회 향토회 전람회’, ‘제2회 서화협전(書畫協展)’, ‘동미전(東美展)’ 등에 작품을 출품했을 뿐만 아니라 「동미전과 녹향전(錄鄕展)」, 「서화협전의 인상」, 「미술에 나타난 곡선(曲線) 표징(表徵)」, 「화단 일 년의 회고」 등의 글을 발표하여 당시 한국화단의 주요 논제였던 ‘조선향토색론’을 앞장서서 이끌어나갔다. 1936년의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는 향토색과 관련된 대표적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당대의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취미에 빠지기 시작하여 전통미술에 대한 애정을 글로 담기도 하였다. 또 수필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舍)와 백귀제(白鬼祭)」를 발표하는 등 미술과 삶에 대한 수필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이들 글들은 『근원수필』로 엮어졌다.
1939년 2월, 월간 문학잡지 『문장(文章)』이 창간되면서 길진섭과 함께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945년 해방 뒤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에는 보성중학교 교사를 퇴직하고 서울대 회화과 교수에 취임하였다. 동시에 「명일의 조선미술」(1946), 「민족문화문제」(1947), 「광채 나는 전통」(1947) 등의 문화예술론을 발표하는 등 해방 후에도 화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48년 6월에는 수필집인 『근원수필』(을유문화사)과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을유문화사)를 출간했다. 그리고 연이어 「고미술 계몽의 의의」, 「국전의 인상」, 「신사실파의 미」를 발표하는 등 전통미술과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국전이라는 새로운 전시체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1950년에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용준은 석 달 후인 9월에 부인 진숙경과 딸 석란을 데리고 월북하였다. 그 전 그의 활동에서 좌익사상에 경도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의 월북은 많은 의문점을 남겨놓았다. 월북하자마자 그는 평양미술대학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1951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과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3에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사퇴하고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에 취임하였다.
이 무렵 미술사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는 등 미술사학자로 활약한 것으로 보아 김용준은 북한 생활에 잘 적응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1962년에는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복직하여 「조선화의 채색법」 등을 발표하였고, 『조선미술사』와 『단원 김홍도』를 출간하는 등 월북 이후에도 전통미술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작품 소개> 『근원수필』은 한국화가·미술평론가·미술사학자·수필가로서 6·25전쟁 때 월북해 1967년 사망한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이 1948년에 출간한 수필집이다. 총 30편의 수필이 들어 있는데, 예스럽고 담백하면서도 호방하며, 향토색 짙은 순수한 우리말이 격조있게 표현되어 있다.
「매화」, 「검려지기(黔驢之技)」, 「두꺼비 연적(硯滴)을 산 이야기」, 「추사(秋史) 글씨」, 「노시산방기(老柿山房記)」, 「원수원(袁隨園)과 정판교(鄭板橋)와 빙허(憑虛)와 나와」, 「승가사(僧伽寺)의 두 고적(古蹟)」 등 30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김용준은 수필을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라고 말하였는데, 『근원수필』에는 당시의 사상 체계를 꿰뚫어 보면서도 옛것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였던 김용준의 문(文)·사(史)·철(哲)이 잘 녹아 있으며, 예스럽고 담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언어 구사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근원수필』은 한국 현대 수필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며, 수필 문장의 진정한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현재도 『근원수필』은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한국 수필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2002년에는 열화당에서 《새 근원수필》《조선미술대요》《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민족미술론》 등 5권으로 근원 김용준 전집이 출간되었다.
단국대 경영학 석사
필리핀국제문화대학명예철학박사
한국고승유묵연구소장
중광미술연구소장
용인한국근대문학관 건립 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