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기(1)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일과 마주치는 때가 있다. 나는 얼마 전 몸이 갑자기 고장이 나서 한동안 병원을 드나들고 큰 수술을 하였다. 암이었다. 암 중에서도 고치기 힘들다는 간암, 그것도 말기라고 할 수 있는 4기였다.
내가 간암에 걸렸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사실 나는 술을 전혀 먹지 않았다. 아니 안 마신 것이 아니라 못 마셨다. 체질적으로 알콜분해능력이 없는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홍당무가 되고 어디 가서 쓰러져 자야 할 정도가 된다. 젊었을 때 생각에 남자는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술을 좀 마셔야 될 것 같아서 여러 모로 노력을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술과는 전혀 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암에 걸린 것이다.
아마도 내 병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환갑 나이 때에 그때로써는 이름도 모를 병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풍채가 좋던 분이 갑자기 비쩍 마르고, 얼굴을 비롯해온 몸이 누런색으로 변하셨던 것으로 보아 간계통의 병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운동을 열심히 해왔다. 산에도 자주 가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몸이 곤죽이 되도록 조깅을 했으며, 여러 가지 근력운동을 꾸준히 해왔었다. 간암이 발견되기 직전까지도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간은 30%만 남아 있어도 제 기능을 다하기 때문에 일찍이 이상유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어느 해 가을, 아무 이유도 없이 몸무게가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었다. 대학 때부터 몇십 년간을 큰 변화 없이 유지해 오던 몸무게가 한 달 사이에 10Kg 가까이 빠지니 이상해서 용인에 있는 어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초음파, MRI 등등......
며칠 후 병원에 갔더니 의사의 말이 간암인 것 같으니 서울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청천병력 같은 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암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80% 이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다시 한 번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역시 간암 4기가 맞다는 것이다.
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함께 분노가 치솟아 올라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무얼 얼마나 잘못 살아왔기에 이런 벌이......? 기가 막혀서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절망과 분노는 가라앉고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힘든 현실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이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병원에 부탁해서 영상자료를 비롯해서 모든 검진자료를 아들에게 보냈다. 아들은 국내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을 대신하는 공중보건의 때는 남극의 세종기지에서 근무한 후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의사면허를 따고 그곳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아들의 전공분야가 바로 간암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과이다.
나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며,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생로병사’라고 해서 누구나 태어나면 나이를 먹어 늙게 되고 결국은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기에 죽음에 대해서 공포스럽다거나 큰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육체적으로 느끼고 견뎌야 하는 심한 고통과 가족들을 포함해서 주변사람들에게 끼치는 많은 폐해를 생각할 때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나 스스로 안락사할 방법을 물었다가 크게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방법을 택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믿는 종교에서 자살은 금기로 되어 있다. 하늘로부터 받은 고귀한 생명을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들 몰래 신께 기도했었다. 제발 빨리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시라고.
그러던 내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아들놈 때문이었다. 아들놈은 내게 울면서 빌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신다면 자식인 저에게 크나큰 한으로 남을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그럴거 아니에요, 제 아비도 못 고친 게 어떻게 남을 고치겠다고 하느냐고요. 제가 의사인데 설마 아버지 밥이야 굶기겠어요? 돈은 생각지 마시고 집도 필요하면 팔고 무엇을 어떻게 해서든지 포기하지 말고 살아만 주세요. 제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아들놈의 이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우선 집부터 팔았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암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1963. 3 - 1966. 2 대전고등학교
1978. 3 - 1980. 8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학 (석사)
1986. 3 - 1988. 2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리학전공 (박사과정)
1979. 3 - 1999. 7 국토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
1988. 3 - 1994. 2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강사
2006. 3 - 2011. 9 충청교육신문사 사장
2004. 1 - 2023. 현 경기도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