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7】
불륜과 로맨스의 구분법
19세기 러시아엔 왜 이렇게 불륜 소설이 많은가. 당시 러시아 사회에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하게 불륜이 많았나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 나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부인’. 여기에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까지 합세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멋쟁이에 매력적인 바람둥이 ‘구로프’는 여러 여자들과의 반복적인 쓰라린 경험에도 계속 새로운 여자와 만나면서 삶을 즐긴다. 결혼하고 아이가 둘인 남자지만, 휴가차 혼자 와 있던 얄타에서 그는 새로운 얼굴에 주목한다. 혼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베레모를 쓴 금발의 젊은 여인, ‘안나’다. 결혼한 상류사회 여인으로 다른 도시에 사는데 무료해서 휴양한다고 혼자 온 거다. 그녀가 먼저 카페에서 구로프에게 다가와 둘은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일주일만에 관계를 갖고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눈병이 났으니 돌아오라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안나가 급히 돌아가면서 둘을 헤어진다. 하지만 끝인 줄 알았던 둘의 관계는 다시 시작되는데...
작가는 작품을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난생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 두 사람은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사람들을 속여가며 숨어서 만날 수밖에 없고 (...) 이 참을 수 없는 속박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을까? (p.57)
하지만 두 사람 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복잡하고 힘겨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p.59)
열린 결말이라지만 이 조차도 작가의 고도의 기술이다. 그들이 다시 만남을 시작한 것은 변함없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불타는 육체의 갈망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불륜을 저지르는 당사자들이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로맨스’라고 믿는다는 걸 말해준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안나와 밀회를 즐기면서 구로프가 하는 말이다.
“구로프는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인간적 존엄을 잊은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했다.” (p.28)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인간적 존엄을 잊은‘ 행동이 바로 자신의 불륜인 줄 모르고 스스로 멋진 말에 취해 남 이야기하듯 한다. 또 모든 사람에게는 비밀아래 진짜 삶이 있으므로 사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 한다. 게다가 자신의 여자관계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필시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없어 하는 동료를 ’천박한 위인‘이라며 분개하는 모습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흠, 그의 기준에 불륜 없는 삶은 ’무료하고 시시한 날들‘(p.39)이란 말이지.
체호프는 작품에서 한 걸음 뒤로 빠져 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판단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주인공 구로프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불륜 당사자의 심리를 그려낸 솜씨가 탁월하다.
이 소설의 결말은 작가가 확실하게 이거라고 쓰지 않았어도 객관적으로 묘사한 책속의 여러 문맥에서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그들은 ‘로맨스’라고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이 그들도 안다고. 불륜이라는 것을. 자신이 가진 부와 지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각오하며 지켜낼 마음은 없으므로.
1982. 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도서관학 학사
1982. 2 한국도서관협회 정사서
1981. 12 대한조선공사
2000-2015년 수능 영어 강사
2018. 11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어담당 근무
2021년~용인일보 '책이 내게로 왔다' 오피니언 시리즈 연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