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걸레라 칭한 중광의 그림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와 명예, 권력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그걸 얻기 위해 경쟁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매한 성직자에게도 어려운 일이며 은거하는 처사를 그린 산수화가나 시인 모두에게도 꿈만 꿀 일이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 그것을 실제로 다 내려놓고 실천하였다면 필시 미친 사람이거나 철저한 위선자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걸레로 불렀다. 차림은 걸레와 잘 어울렸다. 세간의 눈은 아무래도 좋았다. 걸레를 가슴에 품거나 머리에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 구속받을 꺼리가 없었다. 범인(凡人)들이 추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세상 밖의 일이었다. 가족도 내려놓고 여자도 내려놓고 드디어 무애(無碍)의 세계에 다다랐다.

중광스님 작품 ⓒ조대안
중광스님 작품 ⓒ조대안

중광의 그림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의 그림 중에서도 달마, 그중에서도 검은 눈동자에 담겨있다. 은일자(隱逸者)에게 필연적인 구성요소가 고독과 고립이라 하는데 그 모습도 보인다.

명예로 위장하고 돈이나 권력의 뒤에서 별 짓을 다하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보내는 걸레의 방할(棒喝)은 얼마나 청쾌한가. 1990년 6월 9일이었다. 스리퍼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손에는 음식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든 채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동숭동 바닥을 헤메고 다니는 중광울 누가 보고 구상시인에게 일렀다. 그날 서울에는 40미리 정도의 많은 비가 내렸다. 1990년이면 중광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이미 지난해에 대한민국 최우수 예술인상을 수상했으며 구상시인과 ‘유치찬란’이란 시집을, 천상병. 이외수와 ‘도적놈 셋이서’라는 공동시집을, 천상병과는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찬다.’라는 시집을 발간한 해이다. 또 연말에는‘CNN Head line World News 중광 예술세계’가 방영되고 일본 NHK의 ‘Asian Now’ 및 영국 SKY Channel에서 ‘중광 예술 세계’가 방영 예정된 해였다. 그의 그림값은 천정부지여서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치열하였다. 그림을 빌려 가는(가져갔다가 쓰고 되돌려받는 조건)데만 정해진 가격이 5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명인사가 허름한 시장 좌판에서 서민과 어울리며 막걸리를 마시고, 시를 읊고, 거짓과 탐욕에 오염된 세상을 꾸짖었다. 인기를 위해가 아니었다. 소유가 가능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천진의 걸레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미친 중이라 손가락질하며 자신보다 더 못난 인간이 실제로 시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중광은 중학교 졸업도 못한 학력이다. 하지만 불교에 입문하고 40세에 대학과정인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였다. 그의 글씨는 그 어떤 글쟁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다. 얼마나 치열하게 쓰고 또 썼는지 짐작이 간다. 도광양회(韜光養晦)이며 깊은 수행과 선지식으로 탈속(脫俗)한 하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무애는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용기에서 나온다. 용기는 정직에서 나온다. 정직은 청렴과 연결된다. 집착하지 않음도 포함된다. 집착하지 않으니 비어있고 비어있으니 걸릴 것이 없다. 용기란 내려놓을 때 그 정점에 닿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예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생의 저 밑바닥에 처한 이들이나 하물며 동물에게 까지도 동등하게 대해준 것도 바로 정직에서 비롯된 무애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하심(下心)이 아닌가 한다. 바르게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심이요, 올바른 수행자의 마음이 곧 하심이다. 중광의 그림은 하심에서 창조된 선화(禪畵)이다 선화(仙畵)아 아니다. 선화는 느낌과 여백이다. 마음으로 읽은 그림이다. 하심으로 텅 빈 자가 무심으로 그린 그림이다. 하늘의 뜻을 아는 자가 그린 그림이다. 천지의 도(道)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허(虛)가 아니겠는가. 중광의 그림에는 그게 있다.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를 아끼는 법모(法母)는 둘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스님이니 스님의 길을 걷기를 바랬던 것이다. 속세와 거꾸로 사는 자신과 숙명을 같이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랬는지 둘은 헤어졌다. 둘이 헤어진 까닭을 중광은 책에서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생전에 중광과 친했던 신부에게 둘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었이었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명료하였다.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라.” 우리나라에서 중광의 첫 전시회를 마련했던 화랑 대표가 전해준 말이다.

불교에서의 탐진치(貪瞋痴)는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삼독(三毒)이다.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이라 한다. 여기서 치(痴)는 어리석음 보다는 애욕(愛欲)이다. 하심을 깨우쳤기에 애욕마저 바람처럼 잡으려 하지 않았던 중광이었다. 중광을 키워준 것은 제주의 바람 소리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소리의 의미를 몰랐으나 긴 면벽수행의 어느 순간 그게 하심하라는 소리였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중광스님이 떠나실 때의 나이가 되어 님의 그림을 접하며 하심을 배운다.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욕심의 불꽃을 다독인다. 그가 남긴 검은 먹 자국 속에서 제주의 바람같은 허(虛)를 찾는다.

그대가 내 앞을 지나가오

내가 그대 앞을 지나가오

잡은 듯 아니 잡아본 듯

잡힌 듯 아니 잡혀본 듯

 


최계철 
최계철 

-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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