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이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작고 가난한 나라의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중, 전시회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름없는 화승, 미쳤다는 소리나 듣던 중광을 일약 세계적인 예술가로 입적(入籍)시켜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 랑카스터(Lewis R, Lancaster, 1932~) 박사, 중광보다 세 살이나 많은 세계적인 불교학자이며 연구가가 그 주인공이다.

중광스님과 랭카스터 박사.
중광스님과 랭카스터 박사.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동양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외국인으로서 한국불교에 심취하여 그 누구보다 한국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조예를 지닌 학자이다. 가히 한국불교 연구 분야의 대부이며 선구자인 세계적 명사이다. 고려 팔만대장경 전산화를 처음 시도한 학자일 뿐 아니라 40대인 1970년대 초부터 한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불교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물이다. 한국의 불교 경전 등 현대 종교문화에 관한 책을 다수 발간하였다.

박사는 책상에 앉아 불교를 연구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먼 오지라도 현장조사를 통한 실증적 연구와 견문체험으로 불교를 접했다. 불교를 연구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다니며 얼마나 많은 달마와 선화를 접하였을까. 그동안 한결같이 획일적이고 규범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해 한마디로 그만그만한 선화를 수만 점 접하였던 박사는 중광을 그림을 보자마자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선화라고 무릎을 쳤다. 중광의 그림은 랑카스터 박사가 말한 대로 무심필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느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스케치가 뛰어나고 수법은 원시적이지만 대담하고 힘찬 그림이었다. 그동안 보아온 그림들과 달리 솔직하고 자아의식이 배제된 그림으로 순간적으로 감응이 왔던 것이다. 선화는 아무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수행한 자가 그린 그림이어야 한다. 아니면 그저 붓질일 뿐이다. 그의 그림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안 나는 이유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음이다. 무애의 정신 속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후에 NHK는 "꽃도 자주 보면 싫증이 나는데 중광의 작품은 살아있는 꽃보다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싫증이 안 난다." 하였다.

박사는 기꺼이 자비로 중광의 첫 작품집 「THE Mad Monk」를 발간하면서 자신은 결코 돈을 벌기 위해 화집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특히 달마는 아무나 그릴 수 없는 그림으로 중광을 가르친 심산 노수현도 그릴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냥 그리면 초상화요 문인화일 뿐이니 달마는 곧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 전통의 관념과 틀을 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늘 비슷한 모습이었다. 랑카스터 박사는 1983년에 그의 첫 책을 저술한다. 「중국과 티베트의 초기 선(禪)(EARLY CH’AN IN CHINA AND TIBET)」이란 제목의 기념비적인 선(禪) 연구서이다. 그 책의 표지화가 바로 중광이 그린 달마도이다.

그는 아래인 중광, 위선으로 가득차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괴이한 행색과 언행의 낯선 중과 어울리며 점점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언행이 일치된 수행자로서의 선화가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박사가 그의 그림 몇 점만 보고 그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2주간의 동행여행에서 그의 원천을 찾고 싶어하였다. 그리고 중광의 길은 아무나 따라가지 못할 고난의 길이라는 것과 세속의 지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분별하지 않고 유명한 박사인 자신도 중광 앞에서는 한낱 사과장수와 동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무애 정신이 작품의 토대라는 것을 알아채고 곧 중광의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선화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마 랑카스터 박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중광은 없을지도 모른다. 암울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하면 상상하고도 남는다. 불교의 정화 운동, 그리고 독재의 칼날 속에서 중광은 잘 견뎌내었다.

혹자는 중광의 그림이 정형화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의 그림은 일정한 세계가 존재한다. 그의 미술은 불교에서 태어났지만 모두 불교적은 아니다. 선화가 반드시 불교적일 필요는 없음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선이 추구해야 하는 무아정적의 경지, 청정한 지성, 허무와 죽음, 공과 무, 그리고 묵과 적이 녹아있다. 수만 장의 종이를 구겨버리고 수없이 많은 붓을 꺾고 벼루를 던지며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완성한 독창적인 예술이다.

누구의 말대로 스님의 그림자도 감히 밟을 자격이 없는 우리인지도 모른다. 세계 어떤 미술평론가나 비평가 보더 선화에 대하여는 랑카스터 박사의 눈높이를 따라갈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선화를 많이 접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달마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존재로서 달마사상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정신이라는 것을 박사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나 그릴 수도 없는데 한술 더 떠 형상마저 해체한 중광의 달마라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중광이 세상을 떠난 뒤 랑커스터 박사는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서신을 보냈다. 중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의 한 명이며 예술과 지혜의 미래(vision)을 보여주었다고 썼다.

이미 돌아가신 박사의 부인도 미술과 조예가 깊다.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은 7살 때 집을 방문한 중광을 또렷이 기억한다. 마술사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가 영감을 주었을까 모자(母子)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얼마 전에는 내한하여 한국적 작품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박사가 제작한 두 권의 화집에는 100여 점의 작품이 들어있는데 애석하게도 중광이 자랑하는(?) 서예는 보이지 않는다. 왜 글씨는 넣지 않았을까? 보지 못하였을까? 아니면 달마는 달마로, 선화는 선화로, 글씨는 글씨로 남아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림도 글씨이고 글씨도 그림인 중광, 어쩜 달마의 획보다 더 힘이 들어가고 추사의 글씨처럼 선기(書卷氣)가 철철 흐르는 글씨도 선 보여주었다면 좋았을 걸 한다.

 


최계철 
최계철 

-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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