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3】

아름다운 베일 뒤 인생의 진실

『달과 6펜스』의 저자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이 쓴 또 하나의 빛나는 걸작, 『인생의 베일』은 한 어리석은 여인에 대한 통렬한 보고서다예측 불가능하고 흥미진진한 사건의 연속이라 책에서 손을 떼기 어렵다. 앉은 자리에서 밤새워 다 읽었다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 걸 보면 분명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책표지 ⓒ Natasha Krivonosova
책표지 ⓒ Natasha Krivonosova

시작부터 책은 독자들을 살 떨리는 불륜의 현장으로 끌고 간다. 소리 없이 가만히 돌아가는 문손잡이에 숨죽여 떨고 있는 남녀.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온갖 저울질 끝에 마지못해 다다른 결혼생활은 키티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마침내 바라던 최고의 신랑감을 만나 지고의 행복을 누리지만 그는 이미 결혼한 남자. 출세가도의 발판인 아내와 헤어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자신은 쾌락의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키티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세균학자이자 의사인 남편, 월터의 요구대로 함께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의 도시 메이탄푸로 가는 수밖에. 키티를 향한 불타던 사랑은 증오로 변했지만, 여전히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는 월터는 매일 죽어나가 길바닥에 쌓이는 시체들과 죽음과 싸우는 중국인 콜레라 환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자신을 혹사하며 괴로워한다.

시궁창같이 비참한 중국인 마을에서 키티는 프랑스인 수녀원장과 수녀들과 함께 버려진 고아소녀들을 돌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참된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찾기 시작한다. 철저히 배신당하고도 찰스를 끝내 잊지 못하는 자신의 우매함을 절감하면서도 인격도 능력도 훌륭한 줄 알면서도 남자다운 매력이 없어서 그를 사랑할 수 없는 건 자신 탓이 아니라며 뉘우치지 않는다. 사랑할 순 없지만 친구처럼 지내자면서 평화가 찾아오는 듯하던 이 가정에 파국이 닥친다.

키티가 임신한 걸 알자 월터는 자기가 아버지냐고 묻고 대답하지 못하는 아내 앞에서 절망한 그는 며칠 후 콜레라에 걸려 죽고 만다. 존경받을 만한 자질을 지닌 그를 끝까지 사랑할 수 없었던 키티.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끝까지 진심어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월터.

저자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 ⓒ solitaire
저자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 ⓒ solitaire

이 책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월터가 죽고 키티가 홀로 홍콩으로 돌아갈 때, 불륜상대였던 찰스의 아내 도로시가 키티를 찾아와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강권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남편이 바람피는 걸 모두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상대가 모두 싸구려들이라며 비웃는다. 남편을 통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남들에게 보이는 화려한 결혼생활만이 중요하다. 찰스는 능력있는 아내의 도움없이는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절대로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가정을 망치려했던 불륜녀가 곤경에 빠지자 관대하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가식과 위선으로 연출하는 고단수의 도로시를 어리석은 키티는 당해낼 수 없다. 그 집에서 찰스의 유혹에 또다시 넘어가고 그런 자신을 경멸하며 도망치듯 영국 집으로 돌아간다. 뼈저린 실수를 통해 고통을 맛본 키티는 성숙해졌을까?

평생 자신을 무시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를 얻고 이제야 돈만 벌어다주는 기계였던 삶을 떠나 타국에서 행복을 찾으려던 키티의 아버지는 이제부터 효도하겠다고 따라가겠다는 딸이 달갑지 않다. 아버지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살피지도 않으면서 키티는 이렇게 외친다.

내 딸은 자유롭고 자기 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 거예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 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 (...) 그 애가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독립된 인격체이길 바라고 자유로운 남자처럼 인생을 살면서 저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요.” (p.328)

키티는 그동안 겪은 불행으로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이 말이 진심이라면, 행복을 찾아 자유롭게 사시도록 아버지를 놔드리고, 혼자서 꿋꿋하게 자기 손으로 벌어먹으면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독립된 인격체이길바란다면 자신부터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비극을 다루면서 흡인력있는 인물들의 대비와 비중있는 비유와 짜임새있는 구성과 심리묘사로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다.

제목 인생의 베일의 원제는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소네트 ‘Painted Veil’에서 따왔다고 작가가 밝혔다.

살아있는 자들이 인생이라 부르는 오색의 베일을 들추지 말라.

그려진 모습은 사실이 아니며 단지 우리가 믿고 싶은 걸 모방한 거라 해도.

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though unreal shapes be pictured there,

And it but mimic all we would believe

이 작품은 2006년 존 쿠란John Curran 감독, 에드워드 노턴Edward Norton과 나오미 왓츠Naomi Watts 주연으로 <페인티드 베일 Painted Veil> 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페인티드베일 에서 열연한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턴 ⓒ Sunday Observer
영화 페인티드베일 에서 열연한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턴 ⓒ Sunday Observer

 

 


최성혜
최성혜

1982. 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도서관학 학사

1982. 2 한국도서관협회 정사서

1981. 12 대한조선공사

2000-2015년 수능 영어 강사

2018. 11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어담당 근무

2021년 용인일보 '책이 내게로 왔다' 오피니언 시리즈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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