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52】
수난과 구원의 기록
저자 김금희는 20대 시절에 편집자로 일하며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전각의 역사와 쓰임을 살피는 전문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편집자로서 그의 경험은 작가로서 이 작품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고 이제 독자들은 그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수난과 구원의 이야기다. 크게는 창경궁 대온실로부터 작게는 어린 산아의 친구인 스미에 이르기까지.
창경궁 대온실은 무너지는 조선의 현실을 감추려는 듯 영화로운 근대의 표상으로 지어졌다. 해방후 쇠락한 이 건물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철거대상에 오르내렸지만 용케 벗어나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수난이 그치고 마침내 구원받아 살아남는다는 창경궁 대온실의 큰 얼개 안에 주인공인 두 사람 문자할머니와 영두가 각자의 수난으로 무너지고 일어나는 과정의 이야기가 씨줄 날줄로 촘촘하게 엮어진다.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완벽한 구성이다. 19세기 일본의 개항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백여 년의 세월과 일본, 유럽, 미국, 일제시대 경성과 현재 서울과 강화도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넓은 시공간을 한 책에 아우르는데 손톱만큼의 빈틈도 없다. 배경과 장소가 역동적으로 바뀌고 과거와 현재가 다층적으로 흐르며 이 마음은 저 마음으로 연결되고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의 실마리를 품고 있다. 결말로 내달으면서 벌려놓은 모든 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차곡차곡 수습되어 완결을 이룬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하나 뚜렷한 개성이 있어 매력적이며 적절하게 배치되어있다. 살아 숨 쉬며 하도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내 옆에 앉을 듯하다. 특히 인간친화적인 새 곤줄박이로 명명한 ‘제도’ 캐릭터에는 반할 수밖에 없다. “이 의협심 강한 곤줄박이는 금방이라도 깃털을 잔뜩 부풀린 채 일어나 이 무례한 대기상태에 대해 항의할지도 몰랐다.”(p.79)라고 묘사된다.
김금희는 세밀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를 날선 칼처럼 휘두르는 뛰어난 검객이다. 워낙 묘사의 대가지만 실체가 없는 감정까지도 이처럼 눈에 보이듯 묘사한다. “그건 내가 또래에게서 처음으로 느껴본 압력이었다. 머리 위로 뭔가가 씌워지는 느낌이었다. 깊숙한 모자 같은 것이. 정수리를 덮고 이마를 덮고 눈까지 덮어서 시야가 어둠에 잠기고 마는 것 같았다.”(p.54) 수난까지도 이렇게 눈에 보이게 은유하다니.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p.158)이라고.
별것 아니지만 넣으면 음식 전체의 맛이 확 살아나는 양념처럼 영두와 순신의 짧은 사랑이야기는 이 소설에 상큼한 맛과 예쁜 색채를 더한다. 없었다면 꽤 건조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86개에 이르는 방대한 참고자료에 쏟아 부었을 작가의 정성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제 창경궁으로 발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내내 있었지만 몰라서 지나쳤던 아름다운 비밀의 장소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므로
1982. 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도서관학 학사
1982. 2 한국도서관협회 정사서
1981. 12 대한조선공사
2000-2015년 수능 영어 강사
2018. 11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어담당 근무
2021년~용인일보 '책이 내게로 왔다', '두근두근 인생2막' 오피니언 시리즈 연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