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우의 〈화접도〉 비단에 채색, 27X27cm  호암미술관
남계우의 〈화접도〉 비단에 채색, 27X27cm  호암미술관

민화를 대표하는 옛 그림마다에는 걸맞는 화제(畫題)있어 모란도, 어해도, 십장생도, 문자도 등이 보인다. 꽃을 그린 화훼도, 꽃과 나비를 그린 화접도, 식물과 곤충을 그린 조충도도 있고 꽃과 새를 그린 화조도도 있다. 그중 화접도, 호접도(胡蝶)는 호랑나비를 의미한다. 민화의 소재가 그렇듯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데 화접도는 부귀와 영화, 장수, 부부간의 화합을 의미한다고 전해진다. 나비는 흔히 꽃과 함께 쌍으로 그려져 나비는 접(蜨)이라 하는데 늙은이라는 질(耋))의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여 장수한 노인을 의미한다. 예를옛 사람들은 모란과 협접(蛺蝶)을 그리는 것을 풍류부귀도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극히 부귀하고 지극히 풍류하기 때문이다.

나비 그림의 국내 일인자로 한국서화인명사에 호접을 잘하여 신묘에 들었다는 평을 받는 남계우(南啓宇)는 1811년 5월 24일 한양 솔고개 또는 솔재라 부르는 송현동 일대 당가지골에서 태어났다. 부사 벼슬까지 한 관료였던 아버지는 소론명문가의 남진화(1771~1847),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3남 5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호는 일호(一濠), 평생 꽃과 나비를 즐겨 그렸는데 특히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南蝶)으로 불렸다.

그의 그림은 정확한 세필과 사실적 묘사가 특징으로 그가 그린 나비의 종류는 37종이나 되고 워낙 정교하게 그려 암수 구별이 가능했다. 관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시도이다. 봄꽃과 가을꽃이 다르듯 봄 나비와 가을 나비도 다르게 그려야 한다. 직접 나비를 채집하여 책갈피에 끼워놓고 감상했다. 16살 때인가 집에서부터 동소문(혜화문) 이르는 10여리 길을 나비를 쫓아가서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양반의 자제로 의관도 갖추지 않고 뛰어갔을 정도로 나비 사랑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동안의 조선화는 고고한 산수화를 위주로 전개되어 화조화를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것이 20세기 미술사학을 지배했던 일반적 관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의 묘사보다는 의미(寫意)를 중요히 했던 이유이다. 그걸 모를 리 없었던 남계우였을 것이다. 다만 영역이 다를 뿐이었다. 남계우는 시도 잘 쓰고 산수화도 잘 그렸다. 그가 남긴 흔치 않은 산수도를 보면 담담하면서도 속세를 등진 처사의 은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명작이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외로운 호접도와 조충도의 길을 고집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남계우의 용인 시절에 대한 기록은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시인 1866년 8월 세거지(世居地)이 용인으로 전거(피란)하였다는 기록과 그해 10월에 복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56세의 늙으막의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지은 파담팔영(琶潭八詠)의 시가 전해진다. 지금 용인군 문현면 갈담리로 통합된 파담리의 아름다운 여덟까지의 산천 풍경을 읊은 노래이다. 파담리는 노고봉 아래 비아수로 불리는 마을로 경안천가인데 거기에는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조선의 문신이며 대 문장가인 남구만(1629~1711)의 묘와 사당이 있다. 그저 가벼운 자연 예찬이 아니다. 그 전의 기록은 1837년 경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용인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남계우는 1890.1.11 용인의 남촌(남사면 덕성리 남촌에서 숨을 거두었고 고개 넘어 달봉산 꽃골에 묻혔다. 장지는 하곡이었다. 그의 묘소인 남사면 화곡은 달봉산 아래의 꽃이 많이 피는 곳으로 꽃골이라 불리는 곳이니 꽃이 많다면 선생이 평생을 쫓은 나비도 많을 터이다. 왜 남구만의 묘가 있는 저 파담에 묻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곤충학자로 유명한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호의 일생은 대부분 경성에서 보냈고 노시(老時)에 용인군으로 전거하였고 용인군 내서도 또 한 번 근처로 전거한 일이 없을 뿐으로 옛날 양반이 관록으로 살지 않은 관계로 전혀 타향생활을 한 일은 없었다.”

남구만의 경우 부인의 묘소가 용인에 있었고 1771년 부인 묘소로 이장된 것이다. 용인시에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분묘가 무려 400기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 의령 남씨는 파담 마을과 화곡마을 두 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남구만 선생의 권농시 또한 선생이 파담마을에 살면서 지은 시라 한다.

나비하면 장자(莊子)의 글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이 생각난다. 지금의 내가 나인지, 꿈속의 내가 나인지, 저 날아다니는 나비가 나인지... 남계우는 평생 나비를 쫓으며 자유를 유영했는지도 모른다.

국내 몇몇에서 나비를 주제로 한 축제가 열리거나 나비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나비 그리기 대회나 나비 미술관이라면 나비 그림의 제일인자 남계우 선생의 영혼을 품고 있는 용인이 가장 적지가 아닌가 싶다.

 


최계철 
최계철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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