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 이세민이 중국 역사에 길이 빛나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선정(善政)을 한 결과이지만 그 곁에 충직한 신하를 두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신하 중에서도 특히 간의대부(諫議大夫, 현 감사원장 격) 위징(魏徵, 580~643)은 현무문의 변으로 왕자끼리의 권좌 다툼에서 죽은 이세민의 형(태자 이건성)의 심복이었던 신분으로 이건성에게 “당신이 황제가 되려면 이세민을 죽여야 한다.”고.했던 인물이었다. 태종이 즉위할 때의 나이 28세, 위징의 나이는 그보다 18살 많은 46세였다. 바로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를 신임하고 중책을 맡긴 주군이 있었기에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서슴없이 직언하고 주군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충신이 만들어지는가 보다.
그의 일화는 많이 기록되고 회자된다. 정치를 하겠다는, 아니 충신으로 이름을 올리겠다는 이들에게 위징의 이야기는 거의 고전이 되다시피 하다. 조선 초 세조는 신하였던 신숙주에게 “너는 나의 위징”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요즘 떳떳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태종의 질문에 “의지가 약한 자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곁에서 봉사한 적이 없는 자는 신뢰 없음이 두려워 곧은 말을 못 하고, 지위에 연연하는 자는 섣불리 의견을 꺼냈다가 지위를 잃을까 몸을 사려 침묵한다.”고 대답 하였다.
태종이 왕에 오른 지 11년 정도 지난 뒤 올린 유명한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疎)는 중국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대목이다. 십사소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지켜야 할 내용이라면 십점북극종소(十漸不克終疏)는 태종 재위 13년 정도 지난 무렵 그가 사치와 방종을 일삼고 창업 당시의 근검함을 잃었다는 생각에 올린 참언이었다. 좋은 말(馬)을 구하고 보배를 사려하는 잘못, 백성의 재물과 노동력을 가벼이 쓰는 잘못, 방종한 생활에 간언을 물리치는 잘못,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주의, 사치를 즐기는 것에 대한 경계, 비평과 칭찬이 신중치 못함, 종횡으로 말을 달리며 사냥하는 것을 즐기는 잘못, 상하간에 모순이 있는 이유, 왕이 즐거움에 겨워 자만하고 있음을 직언하며 이는 삼가고 겸허한 마음을 점점 끝까지 갖지 못하게 된 것이고, 민생에 재앙이 만연한데 이것은 재앙을 막기 위해 부지런히 다스리는 마음을 점점 끝까지 갖지 못하게 된 까닭이라 지적하였다.
위징은 태종에게 무려 200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다. 태종은 여러 번 그의 직설적인 충언에 노하여 죽여버리겠다고까지 하였다. 그때마다 부인이 어진 군주 밑에 그런 신하가 있는 법이라 하였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5일 동안 조회(朝會)도 중단하고, 통곡하였다. 비문도 직접 썼다. 그리고 세 가지 거울 중 한 개를 잃었다고 하였다. 첫째는 구리거울로 의관을 바로 잡고, 둘째는 옛것이라는 거울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셋째는 사람 거울로 자신의 그릇 됨을 비추는 거울인데 그중 하나인 사람 곧 위징이라는 거울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전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다른 사관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의심하여 위징의 묘비를 부숴버린다.
그리고 2년 후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고구려 원정이 논의 되었으나 위징이 유독 반대하였는데 위징이 죽자 실행한 것이다. (위징의 유언은 고구려에 가지 말 것이었다.) 2개월여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돌아오며 태종은 “만약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하고 한탄하고 부숴버렸던 묘비를 다시 세워주었다.
태종은 고구려 정벌 실패 등의 충격으로 4년 후 51세의 나이로 붕어하게 된다.
위징은 말한다. “사람의 인생에 의기(意氣)가 있다면야, 구구한 공명(功名) 따위 무슨 문제가 되랴.“ 의기인들, 의기(義氣)인들 주군을 모시는 신하가 정직과 청렴으로 무장되었다면 어떤 칼날 앞에서도 당당하지 않겠는가. 청렴은 강(强)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과 위징과 나눈 문답은 대부분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실려있다. 정관정요는 제왕들의 필독서이며 병풍에 베껴놓기도 하도 머리맡에 두고 읽는 리더십의 고전이다. 소위 정치인들의 수난시대이다. 위징과 같은 간신(諫臣)이 지금 있다한 들 ”주군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는 교훈이 잊혔다면야.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현 용인일보 문화에디터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