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헛수고정 진 혁 딱 한 번만 새로워지자고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사는 척했던 나날들. 오늘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 주세요 라는 수고. 사람들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함께 살려고 한 수고. 감동으로 잠들고 사랑으로 깨어났다고 믿었던 나날들. 진짜 정말 아주 확실 완전 너무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이런 말의 연속. 가끔 내가 진짜일 때. 너는 가식이 없어 좋아 라는 말을 할 때. 시가 나의 일부라고 들뜬 날. 개같이 살지 말자던 약속.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그래 그거야! 이런 확신에 찬 하루. 너의 맘에 들려고 너무 애쓴 일.
쓸모없는 사람정 진 혁 안데르센 동화에 라는 동화가 있다. 그 동화는 안데르센의 가난한 엄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데르센의 엄마는 하루 종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빨래를 해야 하는 가난한 세탁부인데 하루 종일 찬물 속에서 일하다가 저녁이면 몸을 덥히려고 술을 좀 마신다. 그런 고생은 아들에게만은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꿈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 마을의 시장은 가난한 여자의 아들에게 너희 엄마는 쓸모없는 여자라고 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술을 마시니까 쓸모없다는 얘기다. 아이 엄마는 결국 빨래를 하다가 찬물에 빠
오래 견디기정 진 혁 요즘 맛집에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일을 종종 본다. 나는 질색이다. 기다린다는 것도 싫은데 더군다나 뭘 먹겠다고 줄서서 기다린다는 행위 자체가 지겨운 거 같아서 싫다. 조금은 다른 시간을 지니고 싶다. 다른 시간을 더 넓혀 보고 싶다. 조금은 다른 정체성을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다.그렇지만 사람들은 줄을 잘 선다. 잘 기다린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고객 줄 세우기를 더 즐기는 것 같다. 줄이 길수록 맛집을 증명하는 것인가? 손님들은 간절하게 오래 기다린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예측 가능할수록
그늘은 참 예쁘다정 진 혁 그늘이 있다는 말. ‘그늘에서 만나자’는 말, 참 예쁜 말이다. 너의 얼굴에 그늘이 있다는 말은 얼굴색이 어둡다는 말이요 근심과 걱정과 아픔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늘이 있다는 말은 괜히 억울한 말이며 괜히 고개 숙이는 말 같지만 나는 그늘이 있다는 말이 좋다. 사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를, 그의 그늘을 들으며 위안을 받는다. 나무 그늘이 더위를 식혀주듯 인생의 더움을 지침을 힘듦을 식혀 주는 그늘. 얼굴에 그늘이 있다는 말은 가슴 아픈 말이다. 그렇지만 그늘이지만 따뜻한 거 같다.“
떨림 그리고 가마정 진 혁 공주 시목동에 돌기와집이라고 있었다. 지붕이 얇고 넓적한 돌로 이어진 집이다. 거기에 공주사대 복학생 형들이 네다섯 명이 집 전체를 독채로 빌려 살았다. 모두 시위와 민주화 운동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복학한 형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형이 거기 있어서 가끔 들리던 집이다. 그 돌기와집에 J형이 있었다. 그 형은 공주사대에서 최초로 학생 대위원회에서 뽑은 학생회장이 아니라 모든 재학생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학생회장이 된 형이다. 어떤 날은 돌기와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자고 간 적도 있다. 아침에
한 생정 진 혁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가 계속되고 눈이 많이 내려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은 요즘. 꿈을 꿨어. 눈으로 덮인 곳. 눈보라로 앞이 안 보이는 거대한 산을 바라보고 있었어. 저 거대한 산속에 내가 그리워하는 옛집이 있어. 눈이 날리고 앞이 보이지 않아 더이상 갈 수는 없어. 나는 가방에서 뿔피리를 꺼내 뿌우~~ 뿌~ 뿔피리를 불었어. 저곳에서 누군가 뿔피리 소리를 듣고 내가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거기 가고 싶다고 알리려는 듯, 어느 맑은 날에 날 데리러 온다는 대답을 들으려는 듯. 손이 뻘겋게 얼도록 불었어. 머
나의 언어정 진 혁 나의 언어는 그의 언어와 달랐다. 나의 언어를 구사하면 그는 못 알아 들었고 나는 외로웠다. 나는 나의 언어를 위해 그의 언어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서 추방되었는지 모른다. 그래 그에게서 추방되었다. 나에게 모국어인 그리움어는 추방된 그의 언어(해답어 또는 이성어라고 지칭한다.) 에서 보자면 외국어다.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가 되는 나라에서 살기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국에서 살기 같다.예를 들어 능소화꽃 속으로 들어간 어제는 아주 멀고 먼 길이었어 라고 내가 말을 하면 해답어는 능소화꽃
죽(粥) 쑨다정 진 혁 어느 단단한 걸음을 딱딱한 하루를 불린다. 모든 것은 숫자다. 숫자는 개인 속에 있다. 그런 하루의 숫자가 흐물어 질대로 흐물어 진 날이 진짜 죽이다.전복(顚覆)된 말들을 칼로 잘게 썰어 전복죽을 쑨다. 내장을 터뜨려야지 내장을 짓뭉개야지 그래야 구수한 전복죽이다. 누군가의 손에 주물러지며 터지는 내장들. 누런 똥물 같은 주장을 바라보기만 한 날. 쓸개즙 같은 비굴을 묵인한 날. 죽 쑤는 일이다.쌀 한 컵에 물 다섯 컵을 부어야 죽이 된다.가면을 썼는데도 죽 쑤고 돌아온 날. 죽은 흐물흐물 녹여진 슬픔의 얼굴
멀고 먼 그리움정 진 혁 그리운 곳은 한 번 가본 곳. 언제 어느 때든 한 번 가 본 곳. 가보지도 않았는데 그리운 곳은 없을 것이다.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리운 적은 없다.다시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은 그리움을 끌어안는 행동이다. 어느 해인가 한여름 순천 승주 장날에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규모의 장터인데 인상적인 것은 띄엄띄엄 양철로 지붕을 한 오두막 같은 집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붕만 있는 형태였고 그 아래에서 생선이며 과일이며 채소 등을 팔았다. 그 낮은 양철지붕 빨갛게 녹이 슨 양철지붕이 보고 싶은 것이다. 장터
언젠가 떠날 나에게정 진 혁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어요. 조르바가 어느 날 한 작은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몽롱한 아흔 살 노인이 아몬드나무를 심고 있는 거예요. ‘이보세요, 할아버지’ 조르바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정말로 그 아몬드나무를 심을 생각이세요?’ 그러자 허리가 아주 심하게 굽어버린 그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말했습니다. ‘애야,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단다.’ 그러자 조르바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죽어버릴 것처럼 행동하는데요’ 그러
질감정 진 혁 질감. 사물이 지닌 독특한 느낌. 우리는 그걸 잘 못 느끼고 지나가는 것은 아닌가? 영하 13도의 추위 속에서 겨울의 질감을 품어본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군청색의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쓰고 고동색 두터운 가디건을 방안에서도 늘 입고 계셨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모습이 어른거리는 하루다. 그러나 그보다도 오늘은 그 고동색 가디건의 질감이 생각난다. 보풀이 심하게 일어나 있던 가디건. 가디건의 질감에서 연민과 차가움과 아버지의 비염과 혼자 방안에서 라디오를 듣는 외로움이 만져진다.
본질에서 벗어나기정 진 혁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주가 어찌어찌 신분에 맞지 않게 나무꾼을 사랑하게 되었다. 왕은 공주에게 주의를 줬지만, 공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나무꾼을 잡아 오게 했다. 왕이 나무꾼에게 말했다. 동그라미가 쳐진 종이를 뽑으면 공주와 결혼시키고 왕국의 반을 주겠다. 대신 엑스가 쳐진 종이를 뽑으면 사약을 내릴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공주와 헤어질 것이냐. 공주가 그 말을 듣고 응하지 말라고 했다. 보나마나 엑스가 쳐진 종이 2개를 가져올 것이라고. 그러나 나무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
꿰맨 자국을 보려고 마음까지 다녀왔다정 진 혁 모퉁이에 있는 동네 해피수선집 앞을 지나면서 아내는 천사들의 옷은 꿰맨 자국이 없대 라고 말했다. 우리는 박음질한 옷을 입고 있지만 타고난 신체는 꿰맨 데가 없다.찢어진 옷을 우리는 꿰매 입는다. 꿰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방파제에서 떨어져 왼쪽 눈 위쪽을 23발 꿰맨 적이 있다. 찢어졌거나 구멍이 나거나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꿰매 입는다.사람이나 저 느티나무나 모두 통째로 살고 있다. 생명은 통째로 산다. 꿰맨 곳이 없다. 가닥으로 나눌 수 없고 상처가 나지도 않고
어둠의 집정 진 혁 겨울, 베란다에 무심코 놓아둔 고구마 상자를 열었다. 지난여름의 햇살이 꿈틀대고 있었다. 살아갈 날들이 뿌리 없는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 온 나는 죄인이었다. 발자국도 없이 걸은 길이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엉켜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빛. 네 귀퉁이 틈으로 줄기가 발을 뻗었다. 고구마들은 뻗어 나가지 못하는 시간을 밀어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한 틈으로 손을 내민 마음이 상자 안을 온통 지탱하고 있었다.마당이 없이 방 하나가 전부인 집. 수원시 북수동 273번지. 등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벽
기하도형을 그리고 왔다정 진 혁 나는 그날 얼마나 더 섬세하고 복잡해지기 위해 대형마트에 갔던 것일까? 속을 다 내놓고 있는 바지락은 나에게 뭘 얼마나 더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인가? 고무장갑의 붉은 손이 맞지 않는 타인이어서 저 속이 캄캄하고 질겨지는 시간이어서 낙지 같은 꿈틀거림이 물컹한 분위기로 나를 끌어당긴다.토마토에서 포도 알갱이를 지나 고등어 눈알을 거쳐 배추의 안쪽으로 걸어간다.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여서 문득 오는 상처들을 저 붉은 대봉은 감 잡을 수 있는가? 그리움이든가 물기 같은 것을 잔뜩 담은 카트가 세일을 외치는
지금도 그렇다정 진 혁 1. 불면만화가게 갈까?싫어 해 놓고친구의 눈치를 살핀다.혹시 나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가?그게 아니고 집에 일찍 가 봐야 해서 그러다가에이 그래 가자 가.오늘 무슨 만화 볼까? 신난 척하며야, 오늘 라면땅은 내가 살게나는 내가 많을 때 불면이 온다.나는 싫어 라는 말을 했을 때 불면이 온다. 환갑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2. 헤픈 아이야, 그 샤프 멋진데? 친구가 좋다고 하면나는 친구에게 샤프를 준다.동화책 재밌니? 나도 읽고 싶다고 하면나는 친구에게 동화책을 준다.운동화가 참 멋지다고 했을 때 운동화를
그물에 걸려정 진 혁 청설모가 솔방울 하나를 떨어뜨렸다. 까만 눈과 마주쳤다. 청설모는 고 귀여운 까만 눈으로 나에게 총을 쏘았다. 이크, 그물에 걸렸다. 그물에 걸린 나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청설모의 까만 눈은 그물을 슬슬 당긴다. 처음으로 산속에서 눈과 귀가 맑아졌다. 내 저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밖으로 나오는 듯 했다.청설모가 내 닫혀 있는 마음을 밀고 들어온다. 그물 속 나를 허둥거리게 한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잠시 솔방울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소나무가 내가 오래 살았던 집인 것 같
한 덩이 밥이다정 진 혁 똥에 앉았던 파리가 팔뚝에 날아와 앉는다. 밤이면 모기가 피를 빨아 먹는다. 아무리 잘 생겼거나 아무리 아름다운 향기가 나도 그들에게 우리는 밥 한 덩어리다. 당신의 하루가 나에게 닿지 않아요. 그런 간절함으로 살아도, 꽃을 흔들며 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해도, 내일이면 죽을 나이예요. 그렇다 해도 그냥 한 덩이 밥이다.빈 밥그릇을 들고 있어도, 달나라에 다녀와도, 문득 어두워 보여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도, 어쩌다 한 덩이 밥이다.성형을 해서 예뻐 보여요. 어떤 불균형과 절룩거림으로 하루를 걸어요.
저녁정 진 혁 1. 저녁40대의 어느 날 잔액이 마이너스인 통장이 나를 보고 있다. 오후가 시들었다. 나는 저녁을 향해 서 있었다.기차를 기다리며 끝없는 선로를 바라본다. 바쁘게 거칠게 지나는 기차들을 바라보며 그 시끄러움은 문득 떠나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사라지는 저 소리를 베고 잠들면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나는 통장의 잔액처럼 찌리릭 찌리릭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기차를 기다린다. 오늘은 붉고 부드러운 혀가 필요하다. 기차가 휘어진 철로를 지나며 중심에서 밀리며 갈리는 소리를 지른다. 밀리는 사람들 밀리는 나무들 밀리는 어제
귀를 대 본다정 진 혁 80년 전두환 정권 때입니다. 전국이 조용할 때입니다. 입도 뻥긋 못할 그런 시대였지요. 학내에 일명 ‘짭새’라는 경찰이 상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집어 치고(하! 그 얘기를 하자면 몇 날을 얘기 할 수 있지요) 2학년 때입니다. 시위 주동 역할을 했다하여 닭장차에 태워져 경찰에 잡혀갔지요. 전국에서 처음으로 졸업정원제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탈춤반에서 미치도록 탈춤을 추고 사고가 경도되어 가는 때입니다.) 이데올로기적인 시위가 아니었기에 경찰에서 조서를 받고 부모님이 소환되었고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