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몸정 진 혁숨은 내가 만질 수 있는 몸이어서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이어서희미한 소리의 관능이어서숨은 육체보다 더 먼 곳에 있다늘 멀리 있어서 숨이 오는 동안 마침내 숨의 리듬을 창조한다너의 숨소리에서 리듬을 듣는다숨은 나를 땡볕의 나뭇잎처럼 묵묵하게 한다묵묵함의 무아경에 빠져든다숨 쉬는 일이 뭐지?살아 있기는 한 거야?굳이 대답을 생각할 필요 없는 일종의 백일몽이 온다숨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당신을 쓰다듬는 손길숨소리는 의미도 없이 문장을 만든다숨은 물처럼 흘러꿈의 강줄기를 이룬다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숨 쉰다모든 나뭇잎들의
네 마음은 내 시간 이전정 진 혁 청보리가 바람에 춤을 추는 4월은 시간 이전이고라일락 그 알 수 없는 향기는 시간 이전이다방금 사라진 고양이 하지만 나는 이따금 이곳에 있을 때말이 필요 없는 이전이 생긴다어떤 그리움의 알록달록한 감정에 손이 닿곤 했다이전을 만지고 있는 중이었을까엄마 뱃속에서 뱃가죽 너머로 들리던 이전의 소리내 탄생보다 앞선 먼 것이 있다그녀와 함께 목련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옆에 없었다시간 이전에 가 있었다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마음은 내 시간 이전이다 ■ 나는 종종 시간에서 사라지고는 한다. 물
은은정 진 혁네 안에는 은은이 가득하다그 동그란 세계가 먼 것에서 왔다내 정신의 은빛 갈치 같은 은은얇은 문장으로 내 어색한 비유로 어쩌지 못하는은은씹으면‘화’ 하면서도 쓴 어느 공간이 오기도 하고손바닥 위에 은은의 눈한 알 입안으로 들어가다 놓쳐 버린다은은 안으로 들어가려고 세상의 다른 기슭에 서서단어들의 밖을 서성거리기도하고은은을 대여섯 알 입에 물면어느 별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난 듯은은은은 잠꼬대를 하며 허공에게 가고 싶다비어 갈수록입 안은 관계를 찾아가는 은은이 구르고은은 흔들릴 때 마다내 생의 끝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은사시
무지의 재능정 진 혁이게 사과야 하지만 나는 사과를 모른다저렇게 흔들고 지나는 게 바람이지 하지만 나는 바람을 모른다내가 가진 가장 뛰어난 재능은무지의 재능이다자신도 모르고서로에 관해서도 모르고기억이 뭔지도 모르다니이 얼마나 뛰어난 재능인가자신을 정말 안다면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이 얼마나 다행인가나팔꽃은 자기가 나팔꽃인 것도 모르고 나팔꽃이다맨드라미를 안다고 맨드라미가 무슨 나쁜 느낌을 갖겠는가좋아한다는 말이 뭔지 알지 못하는 저 행복한 얼굴 좀 봐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저 뭉클한 얼굴 좀 봐내가 있지 않는 위대함당
태양 한가운데 쐐기정 진 혁부어오르고 진물이 났다블루베리를 따다가왔다 쓰리고 따끔거렸다흑색무늬쐐기나방의 유충이태양 한가운데를 피하는 나를 쐈다태양이 팔뚝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배롱나무의 호사스런 붉은 글자들을 질식시켰다그 아픔은우리 몸이 쐐기에 바치는 친근함이래쓰리고 따끔거림은쐐기가 우리를 있게 한 거래친근함은 태양 한가운데 쏘이는 아픔으로 온다는 거야쐐기가 쏘지 않았다면사람들은 쐐기를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거야바람이 나에게 쐐기를 박으며 지나간다죽은 자들의 영혼은 쏘이지 않을 것이다부어오름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태양 한가운데 쐐기흔들리
가지를 튀기면서정 진 혁자신의 전 생애가 자신에게서 날아가 버린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생각하거나 만들어 본 적 없는 음식이 탄생했을 때 내가 다른 누구라는 느낌이 든다. 이미 오래 전에 콩나물 잡채를 해 먹었는데 방송에서 새로운 잡채라고 소개할 때 지금의 나에게서 나는 멀다 어른이 되어 뭔가 깨달았던 것이 이미 내가 그걸 살고 있다는 그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서양 음식을 전혀 알지 못할 때부터 나는 토마토를 썰어 소금을 뿌려 프라이팬에 볶아 먹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생을 살면서 토마토를 요리한 것일까? 허브가 뭔지 알지도 못하던
괜찮아정 진 혁 고양이의 비위를 건드렸다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할 말이 모자라서햇살의 끝을 잡아당겼지만아무 답이 없다바람이 불든 말든한없이 흘러가는저 구름에게말을 꾸어 와야겠다 ■입동이다. 열린 창으로 쌀쌀한 바람이 들어온다. 나를 깨우는 바람. 바람은 아마도 깨어나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사물들도 말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표하지 못할 때 바람 한 줌을 주면 미안함이 가시지 않을까? 가장 순수하고 가장 맑은 말로 나를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미안한 사람에게 노란 국화의 말을 꾸어와 미안함을 대신하는 하루였으면
한 문장 살기정 진 혁 “너는 선 자리마다 환해”“해바라기에서 빛이 뭉클 만져졌어”“너는 간지러움이야”우리는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한 문장을 살아내기도 힘들다“너는 언제나 봄날 같은 얼굴이야”정말 봄날 같이 화사한 얼굴을 만난다면그 사람은 한 문장을 살고 있는 사람“너는 늘 약속을 잘 지켜”이렇게 불리는 사람은 한 문장을 살아낸 사람“아버지는 늘 아침 6시면 일어나셔”아버지는 한 문장을 늘 산 사람“바람은 언제나 시원해”“장미는 정말 아름다워”“나무는 늘 그늘을 줘” 처럼사물들은 한 문장을 거뜬히 살아낸다
휘어 잡아서정 진 혁 이팝나무는 한 사발의 밥을 피워내기 위해온몸으로 그저 밥 한 사발을 피워낸다방울토마토는 초록의 이성을토마토라는 빨간 감각에 모두 바친다나는 왜 무엇을 위한 일을 하면서종종 목적을 상실하는 것일까?삶이란 놈은 자신에게만 향하도록모든 것을 제 쪽으로 휘어잡는다수재민을 위한 봉사를 연민이라는 것이 휘어잡는다시 한 편을 쓴다는 즐거움을 비교의 거만함이 휘어잡는다너그러워 지려는 겸손을 교만이 휘어잡는다노력은 다른 노력이 된다목적은 다른 목적이 된다오직 하찮은 것들만이 나를 휘어잡지 않는다너에게 자두 한 알을 건네는 마음
너를 살고 있다정 진 혁 벚꽃은 잠시 벚꽃으로 산다참으로 오래 사는 곳은꽃잎 속을 걷는 누군가의 가슴 속내가 나로 사는 것도 잠시내 속을 사는 꽃들과 강물과 책들과 음악들 그리고 앵두사람들은 한 번에 탁 죽는 것이 아니라아주 여러 번 죽는다죽었다가도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면 살아나고아무도 불러 주지 않으면 또 죽어 있다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문시들시들 시금치는 끓는 물에 잠시 데치면 더 파랗게 살아난다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 앉아 먼 곳을 살려내고저녁은 붉은 넝쿨장미를 살려 내고내가 없는 것 같은 저녁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비상시 문 여는 방법정 진 혁 내 몸 속에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나는 나를 여는 방법을 모른다내 속에서 화재가 생겨도내 속에서 테러가 일어나도출입문 우측 덮개를 열고빨간색 스위치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열리는 출입문이 내게는 없다내 속의 모든 기억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도나는 나를 여는 방법을 몰라서이 장치를 비상상황이 아닌 경우 조작하면철도안전법에 따라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될 범죄도 저지를 수 없다속이 범람해도누군가 총을 난사해도동동거리며 저 속이 다 타도대설주의보가 내려 꼼짝을 못 해도나는 나를 열지 못해
너무 초록정 진 혁 7월이나 8월을 초록이라 부르면 어때?바람이 쓱 지나가면동네는 오직 초록 한 잎이 흔들리는 모습이다누군가의 말이 초록만큼 빠를까초록~~한 번 불렀을 뿐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초록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공간초록은 뒤덮는다쓰나미처럼 장마처럼 토네이도처럼 온통 초록을 칠해 놓고 지나간다세상은 너무 초록이어서 무의미하다온통 초록이니 초록 이전에도 이미 초록이어서초록 그 이름 하나로 삶은 너무 길다초록~~이것이 전부다꽃들의 향기와 분홍이니 빨강이니 노랑의 색채들은전부 초록에서 나온다세상을 덮고 있는 초록에 푹 빠질 때
새로한 파마가 바람에 흔들려서정 진 혁조금씩 느껴지는 봄기운에 두근두근내 마음이 깊은 줄 알았는데이깟 봄기운에 흔들리다니이상하게 얕다산딸기를 만났다손바닥 위의 빨강이 너무 예쁘다빨간 간지러움이 스멀거린다웃음이 자꾸난다이상하게 얕다머리카락이 눈썹을 간질인다가는 기운이 살살거린다눈썹 위로 풀벌레 소리 같은 시간이 온다깊고 이상하게 얕다달빛을 쬐는 개구리 울음을 바라본 적 있어?옥수수 대가 쑥쑥 크는 버그적버그적 움직임을 본 적 있어?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서 네가 보인다이상하게 얕다아침의 냄새 한낮의 고요 이런 얕음이 나를 살게 한다얕
지점정 진 혁머물러야 할 곳이너무 멀거나너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어디서부터 멀고어디서부터 가까운지알 수가 없다끝을 보기 위해땅끝까지 간 적이 있다끝에서 돌아 설 때 막막함이 왔다가야할 지점이 어딘지 나는 알지 못한다어느 꽃가지에 가야그 어느 지점에 가야당신과 내가 만날 수 있을까한강의 시작은 태백 검룡소라는데어디서부터 나는 나고 너는 너인가이제 너와 나는 끝이야그 끝이 어딘지 당신은 아는가어느 한 점에 오래 머물렀지만그 곳이 이별이 시작된 지점인지 몰랐다벚꽃을 보려면 왼쪽으로 가고오른쪽으로 가면 천국이라는데어디서부터 왼쪽인지
이름을 부르는 이유정 진 혁 “미소야” 부른다그녀가 멈춰 선다맨드라미처럼 빨갛게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가을 냄새처럼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누구를 부르는 것은 그를 멈춰 세우는 일세상 끝에 있다가 잠시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귀를 지으신 이처럼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언젠가 마주칠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보는 일먼 훗날어깨를 툭 치는 저녁이 종종종 달아나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어느 골목에서 능소화 흔들림에 넋을 잃고 서 있거나네가 벚나무 아래 서서 꽃비를 맞는 것은그 때내가 불러 세웠던 이름그 부름에 대답하는 일이라는 걸 ■ 가끔 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