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7】권여선의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 중 ‘이모’는 췌장암으로 살날이 몇 달 남지 않은 여인이 한을 풀어놓는 이야기다. 이모는 온 세상에 대한 증오로 분노를 품고 산다. 아들만 떠받든 어머니로부터 그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 무능한 술꾼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맏딸인 이모가 생계를 떠맡았다. 대기업에 다니며 두 동생들을 대학공부시켜 독립시킨 후에도 여러 번 어머니의 읍소로 남동생의 도박 빚을 갚아주느라 퇴직금도 날리고 신용불량자까지 되었다. 비정규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을 때, 남동생이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6】발자크가 살았던 19세기 전반의 프랑스는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 황제, 7월혁명, 입헌군주제 등을 거친 격동과 혼란의 대변혁기였다. 당시 귀족사회는 남자가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는 분위기라 20~30년 나이차이가 나는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나이든 남자의 사회적 지위와 돈을 보고 결혼한 젊은 여자들이 행복할 리가 없다. 젊고 잘 생긴 미혼 남자를 애인으로 두는 문화였으며 애인이 없는 여자를 불쌍하게 여길 정도였다. 귀부인들은 애인에게 돈을 아낌없이 퍼부어 치장시키고 오페라극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5】거대공룡과 싸워야 할 이유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나이 탓인가 했더니 '도둑맞은 집중력Stolen Focus'의 저자는 아니란다. 테크기업이 훔쳐갔다고. 그러니 우리는 힘을 합쳐 이 거대 공룡과 싸워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39살의 영국인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는 생산적인 작가가 되려고 휴일도 없이 쉬지않고 거의 20년동안 일하다 탈진해, 보스톤항구에서 배를 타고 한적한 섬으로 도망쳤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핸드폰을 버리고 텔레비전과 인터넷도 끊고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로지 책만을 갖고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4】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작가가 나온다면 단연 ‘한강’이다. 그의 글은 그냥 차원이 다르다. 주제며 문체며 기법이며 구성이며 뭐하나 빠지는 게 없이 완벽하다. 『소년이 온다』 와 『채식주의자』에 이어 이 작품도 역시 그렇다.1948년에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을 다뤘다. 1년여 동안 이유도 모른 채 어른부터 아기까지 제주도민의 1/9인 3만명이상이 죽임을 당했고 중산간 마을의 2/3가 폐허로 변했다. 모래톱에서 총 맞은 시신들은 바닷물에 떠내려가고 파놓은 구덩이 옆에서 총 맞은 사람들은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3】아름다운 베일 뒤 인생의 진실『달과 6펜스』의 저자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이 쓴 또 하나의 빛나는 걸작, 『인생의 베일』은 한 어리석은 여인에 대한 통렬한 보고서다. 예측 불가능하고 흥미진진한 사건의 연속이라 책에서 손을 떼기 어렵다. 앉은 자리에서 밤새워 다 읽었다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 걸 보면 분명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시작부터 책은 독자들을 살 떨리는 불륜의 현장으로 끌고 간다. 소리 없이 가만히 돌아가는 문손잡이에 숨죽여 떨고 있는 남녀. 자신의 미모
작년에는 새로 일을 더 맡아 틈틈이 해설하고 책 읽고 독서토론 진행하고 글 쓰느라 눈이 팽팽 돌도록 바쁜 한해를 보냈다. 하루에 세 탕씩 뛰는 날도 비일비재. 여행준비로 읽은 포르투갈 관련 책 20여 권을 빼고도 올해도 백권은 넘겨 체면치레는 했다.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핑계를 이리도 길게 늘어놓는다. 반성하면서 새해 다시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그리하여, 해마다 뽑던 내가 읽은 10대 책이 2023년에는 5대 책이 되었지만, 좋은 책을 읽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 추천한다. 1.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작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2】헐리우드 복수극의 ‘전설의 고향’ 버전사회정의와 법마저도 불의와 무능으로 나를 지켜주지 못해 고통으로 한이 맺힐 때,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피눈물 흘리며 분연히 일어난 주인공이 총으로 따다다다 쏴 갈기든지 아니면 세련된 심판자가 나타나 칼로 쓰윽 깔끔하게 복수해준다. 여기선? 우리에겐 ‘전설의 고향’식 해법이 있다. 정보라 작가의 단편 '저주토끼'다.주인공 ‘나’는 저주용품 만드는 일을 한다. 대대로 이어진 이 가업의 정당성을 이렇게 말한다.돈과 권력이 정의이고 폭력이 합리적이자 상식인 사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1】혼자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라여자가 글을 쓰려면, 연 5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에서 나오는 이 유명한 구절은 수십 년 전 내가 학생일 당시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깃발이었으며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저자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1925년부터 잇달아 발표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와 ‘올랜도’로 호평을 받은 소설가이긴 하지만 뛰어난 비평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여성의 사회적 성취가 드물었을 당시 성공한 여성 작가로서 재능있는 젊은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0】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인 의 공저자인 남편 스코트 니어링이 죽은 뒤 홀로 남은 헬렌 니어링이 자신과 스코트, 각각의 삶, 그리고 둘이 함께 한 삶을 기록한 책이다. 자신이 세계적인 인도 명상가인 크리슈나무르티와 함께했던 시간을 기록한 부분도 흥미롭다.당시로서는 드물게 열일곱 어린 나이에 여자 혼자 바이올린 유학을 떠난 네덜란드에서 세계적인 영적 스승으로 인정받던 인도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났다. 신지학에 심취해 있던 헬렌은 그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들여 바이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39】꿈을 따라가는 가시밭길 그 자체로 위대하다‘쇼코의 미소’는 최은영 작가의 등단작이자 2014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국 여고생 ‘소유’와 일본 여고생 ‘쇼코’의 만남과, 만날 수 없는 외국인이기에 오히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편지교환을 소재로 가족 간의 이해와 치유, 그리고 두 젊은이의 아픈 성장의 과정을 그렸다.일본 여고생 쇼코는 한국의 자매학교를 방문해 소유의 집에 일주일동안 머문다.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무기력한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익힌 일본어로 쇼코와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8】 저자 플래너리 오코너는 1925년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태어나, 아이오와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주와 코넥티컷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5년간을 빼곤 조지아를 떠난 적이 없다. 스물다섯살 때 발병한 루푸스병으로 서른아홉 살에 합병증(신장병)으로 사망한 저자는 짧은 생애에 좁은 고향마을에서 한정된 경험만 가지고도 흑백갈등, 세대단절, 빈부격차와 종교적 편견 등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은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소설집』은 756쪽에 달하는 벽돌책으로 서른 한편의 작품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7】불륜과 로맨스의 구분법19세기 러시아엔 왜 이렇게 불륜 소설이 많은가. 당시 러시아 사회에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하게 불륜이 많았나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 나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부인’. 여기에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까지 합세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멋쟁이에 매력적인 바람둥이 ‘구로프’는 여러 여자들과의 반복적인 쓰라린 경험에도 계속 새로운 여자와 만나면서 삶을 즐긴다. 결혼하고 아이가 둘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6】 1993년 발표된 영화 『남아있는 나날』은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의 명작이다. 오래전, 설인지 추석인지 TV에서 방영된 이 작을 두어 번 봤는데 볼 때마다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영국 귀족을 모시는 집사의 눈으로 본 영국 상류사회의 문화와 유럽 정계 유력 인물들의 모습에,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더한 이야기가 남녀 주연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로 완벽하게 발현된 영화였다.원작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침내 지난달에 읽은 이 작품은 단숨에 내 인생 책 10위안에 올랐다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5】행복의 냄새를 쫓아가 보니저자 에릭 와이너Eric Weiner는 NPR(미국의 공영 라디오방송국) 해외통신원이자 칼럼니스트로 세계 곳곳을 누볐다. 기자로서 전쟁과 질병, 기아 등 불행만을 쫓아다니다가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어 ‘행복의 냄새’를 따라 가기로 한다.「행복의 지도 The Geography of Happiness」는 저자가 현지인의 집에 묵으며 관찰하고 온몸을 던져 그들의 관습에 빠지기도 하고 학자, 정치가, 점술가 등 현지인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외국인들도 인터뷰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4】아직, 겨우 서른단편 은 의 작가 김애란의 작품으로 단편집 「비행운」에 수록된 여덟편 중 하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제인 취준생이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자식들의 고통을 지켜봐야한 하는 세대와 그 고통을 어떻게든 지나쳐야 했던 세대와 그 고통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세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른다.대학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지 못해 알바를 전전하다가 다단계에 빠졌던 주인공 수인. 그렇게 이십대를 보내고 서른이 된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3】자신으로부터도 보호 받아야 할 삶의 기쁨제목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는 미성년자의 양육과 관련한 재판에서 법정이 그들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한 영국의 ‘아동법’을 말한다. ‘키이라 나이틀리’의 영화 의 원작으로 유명한 소설 의 저자인 ‘이언 매큐언 Ian McEwan’의 작품이다. 피오나 메이는 영국고등법원의 가사부 판사다. 빈틈없는 논리와 유려한 명문의 판결문은 대법원장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헌신을 다해 최고의 경력을 쌓다보니 아이를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2】 선을 넘어 달려가다한강의 은 7년 전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탔다.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읽은 이 책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사회에서 통상 용인되는 상식과 정상의 범위를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겨워 불편하기만 해서 이 책의 작품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중에 한강의 다른 소설 를 읽고는 그가 범상치 않은 작가임을 인정했지만, 를 다시 읽고 싶진 않았다. 최근 다시 잡은 는 완전히 달랐다. 분명히 뭔가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1】 그 전쟁터엔 여자들이 있었다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일렉시예비치는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백만 명의 소비에트 여성들이 싸웠는데, 저자는 오년동안 이백명을 인터뷰하고 녹취를 풀어 책으로 펴냈다. 1983년에 이 논픽션 다큐멘터리 산문의 집필은 1983년에 끝났지만, 책에 공산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그리지 않았고 소비에트 여성들의 고통을 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출판되지 못했다. 이년 후에야 출간된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이백만부 이상이 팔렸고 20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30】 기대하지 않았지만 견뎌내야 하는 이란 티비프로그램에 나와 박학다식한 소설가로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김영하의 단편집 『오직 두 사람』은 근래에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유명하다. 제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아이를 찾습니다」와 제3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를 포함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아이를 잃어버렸다가 십일 년 만에 되찾은 부부의 이야기다. ‘꿈에도 그린 아이를 찾아 부둥켜안고 울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란 결론이 당연하지 않은
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29】자연이 나를 부를 때미국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태어난 빌 브라이슨은 영국 와 의 기자이자 여행작가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을 비롯한 여러 권의 여행기 베스트셀러와 그의 박학다식한 지식을 유쾌하게 풀어낸 과학 교양서인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저널리스트’란 명성을 얻었다.저자는 20년 동안의 영국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와 뉴햄프셔주의 하노버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되어 마을 끝에서 그 유명한 “애팔래치아 트레일(Appala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