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1934~2002)과 허무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초 오상순(吳相淳, 1894~1963) 과는 생전에 만난 일이 없다. 둘을 세상밖에서 만나게 해 준 이는 구상 시인(1919~2004)이다. 구상은 공초와 25년의 나이를 뛰어넘어 많은 교류를 하였다.1978년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만난 뒤 교분을 나누던 중광이 1980.4.2일 구상 시인 집을 방문하였다. 그날 식사도 같이했는데 서재에 꽂힌 공초 시집을 발견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면 아마 그 자리가 가장 적당했을 것이다. 구상은 오히려 자신보다 더 깊이 공초의
현대미술의 거장인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애걔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고 한단다. 의외로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같이 보인다는 의미이다.그가 90여 년간 세상에 남긴 작품은 도자기나 데생, 판화를 합쳐 5만여 점에 달한다. 그 작품들은 프랑스, 스페인 등 10개소의 피카소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가끔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한다.그는 소묘를 가르치는 미술교사 아버지에게 채 말을 배우기 전부터 미술교육을 받았다. 10세 때 이미 아버지가 모델을 구
중광의 예술세계는 철저히 공(空)에서 출발한다. 그 공은 무소유와 무애행(無碍行)의 불법을 깨우친 선승의 세계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구상시인은 생전에 중광과 절친하였다. 존경받는 대 시인이 집도 절도 없는 거지 미친(?) 중을 감싸는 통에 비난도 많이 받았고 “카톨릭이 아니다.”라는 극단의 평가도 받았다. 구상시인은 중광과 사뭇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인생 역정 또한 중광과 다르다. 중광은 말 그대로 알몸이었으나 구상은 부인도, 자식도 재산도 있었다.아무리 기인(奇人)을 좋아하여 만남에 차별을 두지 않았던 구상이라 해
한(恨)이 없는 자는 예술을 할 수 없다. 아니 한이 없는 자는 예술을 할 필요가 없다. 무릇 예술은 한으로 빚어진 고독과 상응하거나 그 고독을 회피하기 위해 저지르는 일체의 행위이다. 한이 없다면 예술행위는 한낮에 즐기는 시간 때우기 유희일 뿐이다.중광 또한 위대한 예술가로서 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생적 숙주를 가지고 있음이다. 그 한은 아버지와 떨어져 유년을 보낸 외로움, 죽음과 전쟁의 공포, 출가의 갈등, 혼돈의 가치관, 이별, 자기 예술을 절하하는 세상에서 맛본 숱한 좌절들이다. 젊은 시절의 이 점은 일탈로도 나타났지만 불교
중광은 선화의 대표인 달마를 주로 그렸지만 말, 고양이, 토끼, 곰, 뱀, 호랑이 등 동물들도 즐겨 그렸다. 특히 많이 그린 그림은 초기의 닭과 말년의 학이다. 득도한 표정, 극치의 순간, 그리고 고고한 울음까지 사의(寫意)가 무궁하다. 유독 닭은 쌍으로 그린 게 많은데 가슴이나 성기를 내놓고 애무하며 입맞춤을 하는 그림이 다수이다. 하지만 추잡하게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김홍도나 신윤복의 춘화처럼 은근하지도 않다.불교에서의 닭은 깨달음의 동물이다. 말하자면 깨우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덕성을 가진 상징적 동물이다. 석가는 새벽에 돈
중광이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인기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작고 가난한 나라의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중, 전시회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름없는 화승, 미쳤다는 소리나 듣던 중광을 일약 세계적인 예술가로 입적(入籍)시켜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 랑카스터(Lewis R, Lancaster, 1932~) 박사, 중광보다 세 살이나 많은 세계적인 불교학자이며 연구가가 그 주인공이다.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동양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외국인으로서 한국불교에 심취하여 그 누구보다 한국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이 세상에 태어나 부와 명예, 권력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그걸 얻기 위해 경쟁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매한 성직자에게도 어려운 일이며 은거하는 처사를 그린 산수화가나 시인 모두에게도 꿈만 꿀 일이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 그것을 실제로 다 내려놓고 실천하였다면 필시 미친 사람이거나 철저한 위선자가 아닐 수 없다.스스로를 걸레로 불렀다. 차림은 걸레와 잘 어울렸다. 세간의 눈은 아무래도 좋았다. 걸레를 가슴에 품거나 머리에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 구속받을 꺼리가 없었다. 범인(凡人)들이 추구하는
중광은 참으로 고독하였다. 그의 치장과 기행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예술이 외국에 먼저 알려져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을 때 더욱 고독하였다. 깊은 밤 감로암의 정적 속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말하자면 화려한 연극 무대가 끝나고 나서 중광은 고독해져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었다.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았던 중광이었다. 세인들이 감히 따라 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모든 것들은 고독이라는 단어로 해석이 된다. 중광의 고독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요 극강의 고독이었다. 남과 결코 나눌 수 없는 고독이었다. 환경이 다른 원초적인 고독
중국이 자랑하는 근대화가 중에 제백석(齊白石, 1860~1957)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운다.집이 가난하여 부엌에 물이 고이고 거기서 개구리가 살 정도였다. 몸이 약해 농사대신 목수생활을 거쳐 오로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엄정한 사회주의국가 체제였지만 역시 연줄이 닿아야 성공하는 이치를 거스르고, 배우지도 못한 것이 새우나 개구리들을 그려 화선지를 더럽힌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사물과 너무 같게 그리는 것은 세속에 영합하는 것이고 너무 다르게 그리는 것은 세상을 기만하는 일이라 하여 그 경계를 교묘히 드나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예술과 인간의 스승이요 벗이었다, 그들은 과연 각박한 현실 속에서는 주체할 수 없으리만큼 강렬한 개성과 천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다.”구상시인이 생전 공초 오상순, 이중섭, 포대령 등 당대의 자유인들과 교류하며 한 말이다. 물론 중광을 알기 이전이었다. 중광을 알고 나서는 아예 이렇게 못을 박았다. 그들이 세상을 먼저 떠나고 심심하지 이 사회에는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 하며 중광의 출현은 “먹으로 휘갈겨 놓은 달마의 뒤통수는 내 삶의 허덕허덕 마루턱에서 느닷없이 만난 은총 소낙비”였다.왜
중광(重光) 최고의 그림 어찌어찌 인연이 되어 중광스님을 알게 되고 그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게 된 후 그간에 가졌던 생각들이 많이 변하였다. 뾰족하게 굳어진 것들이 넓고 편안해졌다고 할까. 나이 먹음과 함께 생각이 유연해지고 있음을 알겠다. 이 나이이면 중광처럼 언행도 일치되어야 하는데 용기가 없어 차마 그리하지는 못하니 몰래 추종만 할 뿐이다.사형수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삼중스님이 어느 날 절친했던 구상 시인에게 물었다. 왜 덕망 높으신 시인께서 그런 미친 중과 어울리느냐, 당신만 손해이니 어울리지 말라는 충고였다. 구상시인은
중광의 동화(童畵) 예술에 있어서 유치(幼稚) 그 자체는 자연 그대로인 천진(天眞)의 세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귀하게 간주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듯 어린이의 세계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어린이가 그리는 그림이 아동화(兒童畵)이고 어린이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 아동화라면 의당 안과 밖이 그 세계에 머무는 어린이가 당사자인 작가여야 어울리는데 그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천진의 단계, 유치의 나이를 훨씬 지나치고 이른바 정법(正法)의 수련과정을 거친 성인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이쯤 되면 유
중광의 가짜그림 “불과 몇 년 전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스님의 그림에 대해 대중과 시장은 기인의 기이한 작품이라며 엄청난 환호를 보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환호성은 흔적조차 사라져 그의 작품 가격을 논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거품이었음이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중광 스님의 작품에 대한 작품을 이야기한 평론가들은 과연 어떤 기준에서 작품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의 눈은 일회성이었을까?” 이 글은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H 씨가 2016년 2월에 유로저널에 기고한 「실물경제와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손들 3-(1)」에 나오
중광의 달마(達摩)선이 굵고 크며 힘이 살아 있다. 하나도 같은 게 없다. 무념무상의 세계를 체득하지 않고는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그가 창조한 달마 그림이다.그의 달마는 과거에 존재했던 달마가 아니다. 달마를 달마가 아닌 우주의 다른 생명체로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 위에 난초가 피어있는 달마, 눈동자가 네 개인 달마, 외눈 달마, 눈이 아예 없는 달마 등이다. 이는 그림으로 그린(현실로 보이는) 달마이나 현실일 수 없는 달마이다. 그동안의 달마는 천편일률적으로 규격화된 달마가 대부분이다. 달마는 이래야 한다는 선입감이 그림에 표현
중광의 글씨 중광은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글도 잘 쓴다. 중광은 글씨를 잘 쓴다. 글과 글씨는 다르다. 요즘은 자판시대라 더욱 그렇다. 글은 유려한데 글씨는 개발 새발 쓰는 경우가 많고 글을 잘 쓴다는 사람의 육필을 보면 실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는 관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글씨를 중히 여겼다. 그의 인품이 정직한 글씨를 통해 나온다는 판단에서였다. 중광의 글씨(붓글씨나 노트에 적은 볼펜글씨나)를 보면 중학교 도저히 중퇴자의 글씨로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피나는 연마를 통해 완성된 정직한
중광의 시 우리는 글과 글씨, 그림을 잘 그리는 이를 삼절(三絶)이라 하여 존경한다. 중광이 삼절의 하나로 분류되는 데는 그림과 글씨뿐 아니라 시도 잘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1979년 현대시학의 주간이었던 전봉준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작가이다. 나보다 대 선배이다. 중광을 먼저 알아본 이는 구상 시인이었다.“지금쯤 황소타고 고향에 가면”으로 시작하는 그의 대표작 「재입산」은 짙고 토속적인 서장과 작가의 포근한 심상이 잘 묘사되어 있는 수작(秀作)이다. 시의(詩依)에게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중광의 작품세계를 이끌어주었
중광의 예술과 여인 중광은 1979년도에 갱지 노트에 자필로 이렇게 썼다."참다운 예술이란 Mannerism을 탈피하고 인간의 형식적인 굴레를 벗어나 적나라하게 순수한 내면세계를 시간적, 공간적, 초월적인 기(技)와 예(藝)로써 표현될 때이다. 현실이나 Realist가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예술이 창작 예술이다. 나는 불자의 선사상을 통하여 참다운 인간 회복을 위하여 18년간 학문을 배제하고 고행과 참선수행을 실참(實參)해 보았다. 수행 도중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니 미친놈이란 소리는 식은 죽 먹
중광(重光)을 위하여 중광이 입적한 지 올해가 20년이 되는 해이다. 공교롭게도 20대 대선이 치러진 3.9일이 기일이었다. 윤 대통령 당선자가 대학시절 인연이 있었다고도 하는 중광이지만 아쉽게도 그를 기리는 전시나 행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떠났기 때문일까. 미술계나 문단계가 따라올 자 없는 중광의 도발적인 천재성에 지금도 충격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필자는 부끄럽게도 그동안 중광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먹물 뚝뚝 떨어지는 걸레를 어깨에 메고 미친 행세를 하며 세인의 이목을 끄는 것을 희열로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