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혜의 하프타임, 책이 내게로 왔다 【47】

권여선의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이모는 췌장암으로 살날이 몇 달 남지 않은 여인이 한을 풀어놓는 이야기다.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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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온 세상에 대한 증오로 분노를 품고 산다. 아들만 떠받든 어머니로부터 그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 무능한 술꾼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맏딸인 이모가 생계를 떠맡았다. 대기업에 다니며 두 동생들을 대학공부시켜 독립시킨 후에도 여러 번 어머니의 읍소로 남동생의 도박 빚을 갚아주느라 퇴직금도 날리고 신용불량자까지 되었다. 비정규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을 때, 남동생이 빚에 몰려 어머니에게 죽네 사네 전화한 다음 날 찾지 말라는 편지 한 장 써놓고 집을 나가 세상 전체와 교류를 끊었다. 이모는 죽은 뒤 남은 돈을 1/3씩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조카 부부에게 남기는데,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몫까지 아들에게 주라고 요구하는 모습으로 끝까지 무지몽매한 어머니로 남는다.

집을 나와 평생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자 그는 방탕하게 살다가 있는 돈을 다 쓰면 죽기로 작정했다. 아무 일도 안하고 혼자면 자유로울 줄 알았지만 오히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지독하게 사로잡혀 헤어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강요한 희생이 부당했으나 피할 수 없었고, 그로써 단 한 번의 사랑을 놔버릴 수밖에 없었고, 끝까지 아들만을 위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파렴치함에 진저리를 치다가, 자기를 괴롭히기만 한 인생 자체에 대한 원한만 들끓었다.

작가 권여선 ⓒ 천지일보
작가 권여선 ⓒ 천지일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모가 임계치까지 차오른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어느 날 밤, 불현듯 대학1학년때 기억을 떠올린 장면이다. 자기에게 호감을 가진 남학생이 잡아주길 바라고 간절하게 내민 손바닥에 피우던 담뱃불을 비벼 껐던 일이다. 이모는 성가시고 귀찮았던 거지. 단지 그뿐이었어.”(p.105)라고 말하지만, 그날 밤 자신의 손바닥을 벌려 담뱃불로 지지고 그날로부터 비로소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보기엔, 풀길 없었던 원한과 증오를 나를 좋아했기에 나보다 약한 처지인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퍼부었던 거다. 아무 죄도 없는 그에게 자신이 가했던 폭력은 아무 죄도 없는 자신에게 세상이 가했던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이모는 자신에게 똑같은 벌을 주는 일종의 사죄의식을 통해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작가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내면을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을 너무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덩달아 숨이 가빠지게 만든다.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정곡을 찌르는 간결하고 명확하면서도 단정한 문체로 서사에 몰입하게 해준다.

권여선 작가는 자신이 평생 술자리에서 한 번도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p.271)작가의 말에서 밝힌 술꾼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마다 주인공이 술을 마시고 취하는 상황묘사와 감정표현이 눈에 보이듯 살아있어 흥미롭다.

이 책에 수록된 봄밤도 눈물겹게 아름다운 작품이라 추천한다.

 


최성혜
최성혜

1982. 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도서관학 학사

1982. 2 한국도서관협회 정사서

1981. 12 대한조선공사

2000~2015년 수능 영어 강사

2018. 11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어담당 근무

2021년 용인일보 '책이 내게로 왔다' 오피니언 시리즈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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