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 作 ⓒ최계철
중광 作 ⓒ최계철

현대미술의 거장인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애걔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고 한단다. 의외로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같이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가 90여 년간 세상에 남긴 작품은 도자기나 데생, 판화를 합쳐 5만여 점에 달한다. 그 작품들은 프랑스, 스페인 등 10개소의 피카소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가끔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한다.

그는 소묘를 가르치는 미술교사 아버지에게 채 말을 배우기 전부터 미술교육을 받았다. 10세 때 이미 아버지가 모델을 구해줄 정도였고 13세 때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던 말하자면 싹부터 화가의 기질을 이어받은 체계적인 예술가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에 비해 한국의 피카소로 일컫는 중광은 어땠을까. 보잘것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가난과, 식민지 생활, 살육의 목격, 전쟁, 중학교 중퇴, 해병대 생활, 교도소 수감, 자살시도, 출가, 참선 수행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이었다. 피카소도 가난을 겪고 자살 시도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예술이 잘 따뜻한 온실 속에서 관리되었다고

한다면 중광의 그것은 광야의 거친 비바람 속에서 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대만 보더라도 피카소는 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고도 교수법이 따분하다고 나와 카페와 사창가를 배회하였다. 중광은 어머니 병간호와 가난으로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였다. 피카소는 예술은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나온다고 하였지만 둘의 슬픔과 고통은 단어는 같되 한 배에 같이 실을 수 없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림이나 도자기, 조각 외에도 제목 없는 시도 쓰고 무대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실험도 하였고 중광은 거기에 서예, 테라코타, 춤, 엑션페인딩, 선수행에 연기까지 더한 종합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처럼 위대한 예술가 또한 시대가 만든다. 또 당시의 역사와 국민들의 문화수준, 작가의 환경과 철학이 어우러져 예술가의 이름이 각인된다. 동서양의 그림에는 같은 류(類)라 하더라도 피가 다르다. 그리고 예술의 힘이 특정한 파(派)나 주의(主義)를 형성한다고 볼 때 서구식 예술담론에 안주하는 것 같은 우리의 예술관은 너무 아쉬울 뿐이다. 더구나 계보가 없느니 못 배웠느니 화풍이 어쩌니 하며 멸시하지 않았는가. 중광이 우리가 아니라 외국에서 한국의 피카소라고 먼저 인정받고 역수입된 경우가 잘 말해준다. 33년 전 미국 CNN은 이 화가를 먼저 알아보고 크게 소개하였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특히 여성의 그림이 많다. 그의 여성 집착증은 동양적 시각에서는 마치 성중독자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공식적으로 7명이라니 여성은 그림의 가치상승을 위한 소재이며 도구로서 재료가 소진되면 거침없이 내버리는 잔인함은 혹시 없었을까

반면 중광에게 여인은 영원한 스승이었다. 주위에 따르는 여성들이 부지기수였고 수많은 여성을 편력했다고 자백했지만 적(籍)을 두지도 않았다.

세상이 피카소 그림에 매료하는 까닭은 그가 5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화풍을 입체와 초현실로 돌린 창조에 있다고 한다. 예술 경계의 확장, 무한한 탐구, 여성에게서 얻은 영감 등이 이룬 결과이다. 중광은 천 년 이상 누구도 파(破)하지 못했던 달마를 해체하여 재탄생시키고 미술의 규칙이라는 것을 깡그리 무시한 혁신의 인물이었다. 피카소가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을 그렸다면 중광은 원근법이라는 자체가 없는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8조 원에 이르는 유산을 남겼다지만 중광은 재산 하나 남기지 않고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여인에게 주거나 불사에 바치고 바람처럼 가벼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중광은 피카소를 인정하였지만 자신의 그림은 피카소의 그림과 다르다고 하였다. 중광을 발견한 랭카스터 교수가 그의 그림을 처음 보고 '한국의 피카소'라며 추켜 올리자 중광은 "피카소의 그림은 생각과 기교로 가득 차 있지만 내 그림은 무심선필(無心禪筆)이다."고 쏘아붙였다. 말년의 피카소가 추구했던 것은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리는 것이라 하였는데 중광은 이미 40대에 “내 그림은 설명도 안 되고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며 백지에 사인만 한 그림(?)을 펴들었다. 피카소의 그림이 그의 생각을 읽으면 보이는 그림이라면 중광의 그림은 느끼거나 깨달아야 보이는 그림이다. 중광은 정형된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을 적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고집쟁이었다.

피카소는 ”나는 12살 때 이미 라파엘로만큼 그림을 그렸다. 이후 평생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치기 어린 그림,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그림이라면 중광 그림이 어찌 피카소 그림에 뒤질까 싶다. 모방하기 쉬운 그림일수록 가짜가 많다. 피카소의 가짜 그림이 세상에 많을텐데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중광의 가짜 그림이 가장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닮게 그리고 낙관을 동판에 복사하여 찍었다고 하더라도 선기(禪氣)가 들어있지 않으니 가짜이다.

중광의 그림은 대중과 영합하는 친근감도 그렇거니와 답답하거나 본능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감필과 일격의 그림이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더구나 어떤 계획이나 의도가 없는 고담청정(枯淡淸靜)한 무심필인 것이다.

천재화가 중광을 묻어버린 것은 모더니즘 미술의 권력이었다. 관점을 초탈한 중광의 예술을 형식, 학벌, 파벌이 밟아 내린 것이다.

AI가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왔다. 머잖아 스스로 생각하는 AI도 등장할 거란다. 기교로만 가득한 AI의 그림을 명화라고 열광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뜻이다.

 


최계철 
최계철 

1990년 동양문학 신인상 등단

현 공무원문인협회인천지회장, 인천문협회원

시집 도두를 꿈꾸는 하루 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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