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진선미를 향해 달리는 도승의 경지 같은 느낌

용인일보 이기준 대표가 만난 사람 / 이경재 조각가

 조각가 이경재
 조각가 이경재

솜사탕 맛

엄마 젖가슴 감촉

대리석에서 느끼는 순결과 순백

딱딱하나 사랑이 물씬 배어 나오는 화강암

편편마다 조각가의 열정으로 흠뻑 빠져드는 여름 한나절!

부부 조각가로서 불모지에 씨를 뿌리다

이경재 조각가는 우리 용인이 낳은 순수 조각가로서 차가운 돌에 따스한 인간의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사 같은 예술가이다. 마북동 한국미술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경재 조각실은 들어서자마자 확 다가오는 느낌은 따스한 감성의 예술가, 조각가이다. 익히 이름은 들어왔지만, 세상을 등진 은둔의 예술가 혹은 세속의 모든 희로애락에 오욕을 가슴속에 감추고 예술의 진선미를 향해 달리는 도승의 경지 같은 느낌이다.

이 마북동 별천지에 이경재 조각가와 박민정 조각가는 부부조각가로 유명하다. 이들은 작품으로 서로가 대화를 주고받는다.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고향의 추억, 가족의 사랑, 인간애를 표현하는 이경재 작가와는 달리 박민정 작가는 거칠고 대담한 선으로 인간, 풍경을 통한 희망을 노래한다.

현재 상명대학교 교수인 박민정 조각가는 1998년 제17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그 이름을 떨쳤다. 타국에서 열정을 담아 만든 작품 ‘황혼 들녘에 서서’라는 작품을 공모해봤는데 덜컥 최고상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열악한 한국 조각 미술에 혜성처럼 젊은 여성 조각가가 나타났다고 그야말로 핫이슈를 몰고 왔다고 하였다. 이후에 실력으로 대상을 증명하기 위해 ‘풍경’, ‘지난여름’, ‘풍경Ⅳ’ 등 거친 듯 과감한 듯,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개척자적인 느낌의 작품을 내놓았다.

 

  이태리에서 개인전(2017) / 용인일보  
  이태리에서 개인전(2017) / 용인일보  

이경재 조각가의 작품들, ‘엄마와 아기’, ‘기쁜 날’, ‘우리들 이야기’, ‘세 자매’, ‘오후Ⅴ’, ‘사랑’, ‘기다림’, ‘어릴 적 추억Ⅲ, ’오케스트라 각 사이즈‘ 등을 보고 있노라면 대부분 직립 자세와 공통으로 무표정하게 기호화된 듯한 표정을 통해 작품들은 보편성을 가진 인물상으로서의 함의를 부여받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기둥처럼 보이는 받침대 위에 올려짐으로써 기둥의 연장과 같은 부동의 직립성이 강조되는 기념비적 제시방식을 통해 정감 있는 여성상이나 포근한 모성을 가진 한국적 대표성을 가진 여성상으로서의 상징성이 극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조각가 이경재와 대화

최근 대한민국 미술대전 같은 공모전의 응모작을 보면 회화는 수백 점에 이르지만, 조각은 50점을 넘기 어렵다고 한다. 회화에 비교해 크고 이동도 어려운 조각은 작품제작비도 많이 들고 위험요소까지 따른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조각가들은 생활이 힘들고 쪼들리다 보니 공모전이나 전시회를 자꾸 뒤로 미룬다. 이런 어려운 시대에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조각가가 있으니 바로 이경재가 있다. 푸른 나무가 우거지고 매미들이 우렁차게 울어 작업을 재촉하고 있는 마북동 작업장에서 만나 둘만의 얘기를 진솔하게 나눠본다.

작업실에 작업 삼매경에 빠진 조각가 / 용인일보  

Q. 원래 고향은 어디며 학교는 어딜 다녔나요?

A. 원래 용인군 백암면 용철리예요, 그곳에서 자라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성중학교 2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제게 미술에 소질이 많다고 너는 꼭 미대를 가라는 말에 미술동아리에서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제 나름 재미와 능력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미술에 너무 빠져 있다 보니 학교공부를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용인은 그저 조그만 시골 읍이었어요. 좋은 선생님께 지도받지도 못하고 거의 혼자 아니면 친구들과 서로 평가하며 수정하고 그런 수준이다 보니 막상 대학 진학하려고 좋은 대학에 가보니 상당히 수준 차이를 느꼈어요, 한마디로 우물 속 개구리였지요. 하지만 대학은 꼭 진학하고 싶어 바로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Q. 오늘날 AI 시대에 왜 돌조각을 하느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작품들을 보면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상당히 작업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A. 그냥 운명처럼 돌이 내게로 왔다고나 할까, 돌 조각은 삶의 과정 같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다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회화나 조각들이 다 표현할 순 없지만, 기계가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사람의 손작업으로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리석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며 실수가 있을 수 없는 과정이라 처음부터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해야 합니다. 돌을 만지면서 ’촉각에 의한 상상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돌의 텍스처가 중요하죠, 때로는 돌이 아니라 아주 말랑말랑한 물질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마치 가변적인 속성을 지닌 어떤 유연한 물질을 다룬다는 느낌이 저를 몰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Q.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아카데미에서 7년간 유학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경험은?

A. 토스카나의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카라라는 구상성이 강한 조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술의 도시입니다. 그곳의 스승들에게서 조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체 표현을 철저하게 교육받았습니다.

당시 로마나 바티칸에서 조각품들을 보며 ’내가 저렇게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고 마치 늪처럼 헤어나질 못하고 허우적거렸습니다. 카라라에서 조각 공부는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아카데미의 스승들은 학생들 특유의 감성을 인정하고 원하는 것을 지원하며 용기를 불어넣는 그런 분위기였고 저 나름 재능을 발휘하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인맥과 학맥으로 꽉 막힌 우리나라 현실을 떠나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하는 그곳의 분위기가 대단히 좋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분위기가 자리 잡을지 이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Q. 작품의 성향이 유학 후 유연하고 다양해 졌다고나 할까, 왜 이런 성향으로 바꿔어졌는지요?

A. 저는 항상 대중의 호응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지 않는 작가는 죽은 예술가라고 생각하죠, 아무튼, 대중들이 즐겁고, 한 번쯤 ’사랑스럽다‘, 혹은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합니다. 시간의 흐름과 사유의 깊이에 따른 하나의 표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Q. 2006년부터 작품은 단순해지고 내용은 더 유머러스해진 것 같습니다. 거기에 한국적 정서가 포함되어 부부상, 모자상, 가족상이나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느낄 수 있는 시리즈가 많습니다. 이렇게 가족의 중요성, 화합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조각하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아이까지 생겼죠. 가정을 꾸리고 제 작업은 크게 변화했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해 더 온정어린 시선을 갖고 사랑의 힘을 더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제는 ‘함께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 속의 사람을 소재로 합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변화죠. 더군다나 엄마와 어린아이, 그것은 인류가 소망하는 영원한 예술적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Q.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녹아있는 느낌입니다. 처음 볼 때는 신선하지 못하고 그냥 매우 익숙하다는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새로운 면모가 돋보입니다. 돌이라는 자연물과 접하며 물아일체의 경지, 그런 도를 통한 경지에서 나온 작품이라서 그런가요?

A. 너무 과찬의 말씀이고요, 제가 미련할 정도로 사물에 천착해요. 돌을 다루다 보니 돌 같은 사람이 된 거 같아요. 돌은 하나의 생명체로 숨을 쉬고, 말을 걸어오고, 나긋나긋하게 유혹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압적이고 무지막지하게 저를 꼼짝 못 하게 누르기도 하죠. 어쨌거나 전 그 돌이라는 영속적 재료에 정반대의 이미지인 ’가벼움‘이나 ’경쾌함‘ 혹은 ’편안함’이나 ‘안온함’을 주입하고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조각가 삶의 길이 매우 어려워 보이는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A. 돌조각은 극도의 인내심과 정교함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저는 오로지 집과 작업실만 오가며 머릿속엔 작업에 관한 마인드맵 만이 꽉 차 있습니다.

저라고 쉽게 가고 싶은 생각이 없겠어요, 하지만 이것이 제 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성에 장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업실을 떠나면 불안해 작업을 않더라도 여기서 작품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좋습니다.

Q. 선생님의 작품의 인물 표정은 너무 획일화되어 있지 않나요? 어떤 파격적인 표정을 보인다면 훨씬 더 흥미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A. 저 역시 그런 딜레마를 느낍니다. 서양 조각의 아르카익(Archaic)한 요소와 한국적이고 거칠고 투박한 요소가 공존하는 그런 작품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죠.

Q. 선생님의 작품에는 서양 조각의 미감과 한국의 불교 조각의 미감이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혹시 전통을 가져와 같이 할 생각은?

A. 저 역시 오늘날 한국인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고, 온화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찾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정을 공부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해야겠죠. 예술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 실타래 같은 거잖아요. 그저 꾸준히 할 뿐이죠.

 

이경재 :

태성고등학교졸업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졸업

이태리 CARRARA 국립미술아카데미아 조각과 졸업

개인전 23회(서울,이태리)

국제조각심포지움 4회(이태리.이천)

국제아트페어(서울,이탈리아,스위스,홍콩,싱가폴,발리 등)


인터뷰 후기

조각가 이경재는 이태리에서 계속 조각에 열중했으면 일찍이 이름을 떨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예술적 완성을 위해 안으로 안으로만 만족을 향해 정진하는, 그는 오로지 고독한 예술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마북동 한 한적한 공간에 파묻혀 오로지 돌과 사색하고 대화하는 그는 온전히 예술가라 불러 마땅한 대가의 풍모를 가진 사람이다. 고국에 돌아와 자신의 실력을 떨치고 싶었다. 그러나 고국에서는 구태의 모순을 타파하기엔 너무도 힘이 들었다. 

그의 애착심과 진실함이 묻어있는 작품들을 만져보며 그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반추해 본다. 생명체로서 숨을 쉬고, 대화를 나누며, 내일의 꿈을 함께 꾸는 마북동 작업장의 작품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라 믿으며 차가운 돌에 생명의 따스함을 불어 넣는 우리나라의 조각가로서 국보적인 존재라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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