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명식은 예술가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뭔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것만 같이 목마름이 심각할 때 맨하탄 동쪽 슬럼가로 훌쩍 떠났다.교수로 만족하며 살 것이냐, 잘팔리는 그림을 팔아 먹고 사는 화가로 남을 것인가, 진정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영원한 예술가로 남을 것인가 하는 번민과 고뇌 속에서 맨하탄 이스트 하우스는 화가 김명식에게 세상의 평화와 공존이라는 화두를 던졌다.타고난 피부색으로 흑인 황색인 백인으로 차별되는 불공평한 세상에 모두가 하나되는 세계일화(世界一花 )를 꿈꾸며 '우주는 한송이 꽃이다'라고
용인 운학동 내어둔에 대덕사라는 작은 토굴에는 일하스님이 계신다.말이 사찰이지 신도도 별로없는 이름 없는 산기슭의 암자다. 그러나 이곳에는 올곳고 어느 대찰의 선승 못지 않은 눈 밝은 일하스님이 계신다.출가한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파릇파릇한 선기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해맑은 미소를 간직한 채 수행중이시다.■ 필자와 동갑내기 일하스님화초를 좋아하시여 거실에 난향이 가득한 암자는 반짝반짝 윤이나는 옛가구가 놓여 있고 벽면에는 설정스님이 일하스님의 선방수행을 격려하는 편지가 편액되어 걸려 있어 더욱더 산사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나도 사
칠장사(七長寺)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제도시켰다는 전설이 있는 칠현산에 위치해 있다. 칠장사는 임꺽정의 전설과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어사 박문수의 기도처로 더 알려져 입시철이 되면 많은 신도들과 불자들이 찾는 전통사찰이다.칠장사 입구에는 조선시대부터 이 도량을 가꾸며 수행하던 옛스님들의 무덤격인 장엄한 부도탑이 일렬로 서서 수 백년째 오고가는 신도들에게 합장을 받고 있다.부도탑을 지나면 좌측으로 당간지주가 수
유무상통 (有無相通)있는것과 없는 것은 서로 통한다.세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둘이 아니다.없는 것은 새로운 것을 있게 하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구름이 생겨나면 있는 것이고 구름이 사라지면 없는 것이다.삶 또한 마찬가지다.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생은 한 조각구름이 모여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그 보여지는 구름이 다시 흩어지는 것 같다.사람의 육신이나 일체 만물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본 요소로서, 사대(四大)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우주 만물은 지ㆍ수ㆍ화ㆍ풍의 이합집산으로 생겨나기
전 서울대 미대교수이며 화첩기행 4권의 저자인 김병종 선생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이다.서울대 미대학장을 역임했으며 허백련 미술상, 선 미술상, 대한민국 녹조근조훈장 등 자랑스런 전북인상도 수상했다."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은 조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으로 그가 쿠바 ,멕시코, 브리질, 아리헨티나, 페루, 칠레 등 남미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느낀 폭넓은 감동을 풍성한 예술적 상상력으로 오롯이 담아냈었다.김병종 선생은 순수 예술가로서 폭넓은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보기드문 화가로 그의 유려한 필력
이문세는 광화문연가, 알수없는 인생 등으로 국민 가수의 반열에 올라 수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인기가수다.그러나 그가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이며, 사진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가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필자는 이문세 가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내게는 늘 전생의 고향으로 기억하고 있는 네팔 히말라야 설산속 어린이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평생에 한 번도 가보기 힘든 히말라야를 시간이 나는 틈틈이 그곳을 찾아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 이문세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이다.세계 최
대학로에는 철물점 주인이자 철물장인인 최홍규 선생이 잊혀져 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쇳대 4000여 점을 모아 쇳대박물관을 건립했다.설계는 작은 박물관 설계로 유명한 한국 최고의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이 하셨다. 외관이 녹슨구리 통판으로 설계돼 멀리서 보면 사각의 큰 상자처럼 보이는 참아름다운 공간이다.이곳에서 영원한 산사나이 엄홍길 선생의 16좌 등정을 축하 겸 광화문연가로 잘 알려진 국민가수 이문세 씨가 히말리아 등정에 동행해 설산의 비경과 엄 선생의 등정모습을 촬영한 사진 작품전시회가 열렸다. 노래만 잘하는지 알았는데 사진촬영에도
입산 수도하던 수행자가 하산하여 인사동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전공인 그림을 그리다 어느날 울릉도 오징어잡이 선원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화광동진하던 시절, 자신을 취재 하러 왔다가 태풍이 일어 발이 묶인 잡지사 여기자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중편소설로 문예지에 등단한 사모님은 경상도 출신으로 쌀 발음이 서툴러 살이라 발음하셨다.■ 내 심장을두드리던 수리재홍천 강변에 돌집을 짓고 티벳연구소 "수리재"라는 간판을 걸고 티베트의 문화와 불교를 알리는데 앞장섰던 다정 김규현선생은 티벳라싸 대학에서 불교와 탕카를 연구하고 여러 권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향린동산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겨울 채비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색동저고리를 훌훌 벗어젖히는 어느 날 이경재 조각가의 집을 방문했다.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동백동 향린동산에 지인의 배려로 보증금 100만 원에 월10만 원짜리 방을 얻어 한국에서 새 삶을 막 시작할 때였다.약간의 곱슬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예술가는 패기만만했다. 필자는 이 작가와 참 오래된 친구가 되었다.필자와 학연은 없었으나 고향과 나이가 같고, 미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늘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 편하게 한세상을 지금도 동행하고 있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김수용 감독이 3일 별세했다. 향년 94세.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김 감독은 양주남 감독의 "배뱅이굿"(1957)의 조감독으로 참여한 후 1958년 "공처가"로 감독 데뷔했다. 60년대 최고 흥행작으로 꼽히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를 비롯해 "갯마을"(1965), "안개"(1967), "산불"(1967) 등의 작품을 내놓으며 60년대 영화계를 이끌었다.1986년 중광의 일대기 "허튼소리"를 제작하고 공연 윤리심의검열에서 12편이 삭제되었다.“영화의 생명인 창의성 말살행위”라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3·34대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 스님이 화재로 11월 29일 입적하셨다.1954년 춘천 태생인 스님은 1972년 해인사에서 지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1974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은사(恩師)는 조계종 제3대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경산스님이였으나 일찍열반 하셔 제30대 총무원장을 지낸 정대 스님으로 건당하셨다.경산스님의 본찰은 강원도 고성 건봉사이다. 정대스님으로 은사가 바뀌면서 자승스님의 본찰이 용주사로 변경됐다.스님은 1980년대부터 총무원 주요 보직과 조계종 입법기관인 중
밤바다처럼 출렁리는 장발을 휘날리며 도시의 뒷골목을 어정거리던 시절, 이외수 선생님을 만나러 춘천 명동다방을 어른거리던 시절이 있었다.1980년 서울의 봄은 피 끊는 청춘을 더욱더 흥분되게 하고 혼돈의 현실 상황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었던 시절이었다.독재자 앞에 돌을 던지지 않으며 강의실을 지키던 학생은 학구열을 상실한 의식 없는 청춘이 되고, 길거리로 나서지 않는 교수는 교육열이 없는 지식인으로 도매금에넘어가던 시기였다.피 끊는 젊음은 불의에 항거하며 피난처와 돌출구를 찾았고, 방황의 자유와 타락의
불교신문 여태동 편집국장이 쓴 여행기 '라다크의 미소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자꾸 박청수 교무님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한때, 나는 여태동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화가 S와 히말리아의 설산 속 네팔 카투만두와 룸비니동산, 포카라를 자유로이 떠돈 적이 있다.1년에 한 번도 목욕을 안한다는 설산에서 만난 소녀의 미소는 속세의 콜드크림을 두껍게 바른 속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해맑기만 했었다.교무님의 미소는 언젠가 히말리야에서 만났던 소녀의 미소와 흡사하다.■라다크의 미소를 간직한 영원한 마더. 얼마전 기안84와 유명
용인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 모래실에 시골책방 이 있다. 모래실이라는 지명이 참 친근하다. 책방이 있을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장소에 키 큰 참나무와 밤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그곳에 새장처럼 생각을 담는 집이 웅크리고 있다.김창완 선생이 라디오에서 임후남 작가의 라는 책 소개를 듣고 무작정 달려갔다.내 고향마을에 책방이 생겼다니, 그냥 기분이 좋았다. 나름 평생 책과 활자중독자로 초간본 책을 수집하며 살아온 나로서, 가보지 않으면 죄가 될 것 같았다.책방을 방문한 것은 책을 사기위함이 아니라,
용인 한국미술관에 마북동 밭에서 뒹굴던 막돌로 용인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조영남 선생님 조각상이 있다.그곳에서 조영남 선생님의 작은 음악회가 열렸고, 그때 중광스님과의 인연도 처음 들었다. 중광스님의 저서 벙어리절간이야기에서 중광스님이 선생님을 기인이며 대인으로 칭찬한 것이 허구가 아닌 것도 한국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그림을 보관하는 창고에는 조영남 선생의 작품 화투 비광그림이 있다.그림 속에는 비 오는 날 우산을 쓴 서울대 마크가 달린 교복을 입은 조영남 선생님이 서계신다. 서울대학 졸업장이 없는 컴플렉스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어느 이른 봄날, 시인 김지하 선생님을 뵈러 일산으로 향하는 길에 용인백옥쌀 5포대를 선물로 들고갔다.댁에 들려 연락드리니 아파트 현관까지 나오신 김 선생님은 입구에 놓인 쌀을 보시고는 “왜 이리 많은 쌀을 가져왔는가?” 하시며 웃으셨다.댁에 들어가 큰절을 올리고 “진맥을 못봐 보약을 지어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보약값을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님은 먼 데서 온 나를 보고는 신명이 나셔서 거침없는 욕설과 유머로 독과외를 하기 시작했다.대화의 시작은 서산대사의 시 한 편이었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덮인 들판을
비사란야에서 만난, 만다라 기리며 양평군 청운면 산골짜기 좁다란 농로길은 가도 가도 끝이 나오지 않아 지쳐서 돌아설 때쯤, 가파른 산 중턱에 제비집처럼 자리잡은 비사란야 절이 나왔다. 이름만 절이지 10년을 비워두었던 폐가 수준이었다.말이 씨가 되고 글이 현실이 된다던 본인 말처럼 평생 만다라에 걸린 운수납자가 되어 본인을 괴롭히며, 지산이라는 그물을 뚫지 못하고 지금도 만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주인장없는 빈집 마당엔 온통 쓰레기와 온갖 잡지,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의 택배 포장지가 널려 있었고 현관을 들어서자 누렇게 변한 벽면에는
올해가 정지영 감독이 데뷔한 지 40주년이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가 시작이었다. 집에서 책방을 운영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정 감독은 책을 읽듯 이범선의 오발탄 영화를 보고 놀랬다.전쟁 직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방향을 잃고 잘못된 사회 현상으로 남동생은 권총강도가 되고, 정신병자가 된 어머니, 아이를 낳다 죽은 마누라, 영양실조로 죽은 딸 등 가족의 비극사인 이범선 원작 오발탄이라는 영화를 보고 본인이 알지 못하던 세계가 있다는 놀라움과 잘못된 사회의 상황과 문제의식에 눈을
우리 시대의 천재 화가 중광을 기억하며..1998년, 참으로 쓸쓸한 한 해였다. IMF 외환위기가 온 것이다.한국인이면 누구나 실의와 허무 속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만 하는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때 나도 황학동과 인사동을 배회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도산한 기업체 사무실과 사장실에 폼나게 걸려 숭배받던 그림과 글씨들이 폐품이 되어 황학동 고물상으로 밀물처럼 들어왔다.불교 공부의 첫걸음이던 고승열전의 주인공들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고승 유묵(遺墨)이 막걸리 한 잔 가격도 안 되는 금액에 눈 밝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